엄마가 두 번의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생존한 지 1년. 그리고 내게 보호자라는 다른 이름의 정체성이 생긴 지도 1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엄마를 대신해 몇 번의 크고 작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대체로 그 선택이란 것이 힘들지는 않았다. 전문가의 권유를 귀담아듣고 따르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간혹 생겼다. 그중 가장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는 것이 엄마의 호흡곤란 증상을 해결하기 위한 치료법을 결정했을 때이다.
대학병원 교수님은 내게 두 가지의 선택지를 주었다. 1) 목관 시술을 받는 것과 2) 경직성 기관지 내시경 수술이 가능한 큰 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받아보는 것. 나는 2)를 선택했다.
선택지는 단 둘이었지만 결코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무엇이 엄마에게 더 적절한 선택일지 확신 할 수 없었다. 밤이 늦도록 인터넷 공간을 떠돌며 이런저런 정보를 모으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엄마가 목소리를 잃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드시던 음식을 드실 수 있었으면 했다.
그런데 이제와 나는 그때의 선택을 후회한다. 2)의 선택과 수술이 있은 지 딱 1주일 후, 엄마는 1시간 30분가량 지속된 뇌전증과 기관(기도) 협착으로 다시 중환자실로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연명치료 중단 이야기까지 오고 갔지만 두 번째로 찾아와 준 기적 덕분에 엄마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처음보다 더 많은 장애가 남겨졌다. 피하고 싶던 1) 목관도 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는 뇌전증과 기관 협착의 전후관계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그 말로 이번 사건과 그 수술의 연계성에 명확한 선이 그어졌다. 병원에다 난리라도 한 바탕 쳐 볼까, 시위라도 해 볼까 하다가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선택은 나의 몫이었고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까.
엄마가 두 번째로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 도무지 엄마의 세상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엄마를 그렇게 만든 것만 같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누워 ‘왜 엄마가 그렇게 되었을까’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 수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삼킴 장애 때문에 그간 잘 드시지 못해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무언가 있는 걸까. 난생처음 내 직업이 의사가 아닌 게 후회스러웠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많이 찾아보고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었기에 결과도 좋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목소리. 먹는 거. 다 중요하지. 하지만 그것 모두 살아 있을 때의 일이다. 나는 그때 엄마에게 보다 안전하고 부담이 없는 선택을 했어야 했다. 뇌출혈 이후 남겨진 장애로 엄마의 몸은 너무도 약해져 있는 상태였는데 그때 내가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렸던 것이다.
전문가조차 결과를 장담할 수 없을 때 혹은 특정 치료가 환자에게 도움이 될지 아닐지를 판단하기 어려울 때 그 선택의 몫은 오로지 보호자가 져야 한다.
보호자들은 최선을 다해 고민한 다음 특정 안을 선택하게 되지만 그에 따른 결과는 최선이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너무 자책만 하지는 않기로 하자. 때로는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만 보이는 것들도 있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