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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잉고잉 박리라 Oct 22. 2023

엄마가 내게 물려준 유산

내게 죽음은 늘 멀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유치원 때였는지 초등 저학년 때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외할아버지도 그즈음이었다. 외할머니는 내가 다 자라 대학원생활을 하던 무렵이긴 했으나 그땐 내가 너무 바쁘게 사느라 가족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당연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죽음은 지도 교수님이었다. 위암이었다. 내가 박사과정 코스웍을 수료할 무렵, 교수님은 위함 말기 판정을 받으셨는데 그전부터 수면 장애로 1년가량 어려움을 겪으셨다. 어린 시절부터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고르라고 하면 아빠 말고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런 내 맘속 1등의 자리를 위태롭게 할 만큼 나의 지도교수님은 멋진 분이셨다. 학문적으로도 인품적으로도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스승의 날마다 초대를 받아 교수님의 댁을 방문하곤 했는데 그때 엿본 교수님네 가족의 분위기는 딱 ‘단란하다’란 표현의 표본과 같았다. 사모님이 해주 신 집 밥 역시 더없이 맛있고 따스했다. 그런 교수님이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된 이야기는 무척 충격적이었지만, 학교에 계시는 교수님의 모습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주 오래되어 조금 해지긴 했으나 늘 입던 그 단정한 정장을 입고 늘 그랬듯 정시에 교단에 서셨다. 채점도 과제도 모두 당신이 직접 하셨다. 아프다고 해서 자신의 일을 대학원생들에게 전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방학기간에는 교수님의 모습을 뵙기 어려웠지만 암에도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교수님의 모습에 안심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꿈자리가 좋지 않아 사모님께 안부 전화를 걸었는데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사모님 목소리가 썩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고. 혹시 교수님께 인사를 건네고 싶다면 지금 병원으로 와도 좋다고 하셨다. 정신없이 택시를 타고 달려가 뵌 교수님의 모습은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내심 ‘죽음’의 모습이 몹시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교수님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오랜 항암으로 피부색은 몹시 짙어진 채 체중이 너무 빠져 피골이 상접한 듯했지만 표정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평안했다. 눈을 감고 평온한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교수님께 다가가 손을 잡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얼마 뒤 교수님은 숨을 거두셨으나 교수님의 얼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흡사 광채가 나는 듯 해 내 눈이 의심스럽기까지 할 정도였다. 투병기간 동안 교수님네 가족들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겠지만 죽음, 그 자체만 보았을 때에는 이렇게 평화로운 죽음도 있을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다음이 엄마. 나의 엄마는 여전히 생존해 계시지만 죽음의 고비를 수 차례 넘겼다. 그런 엄마를 지켜보며 나는 천국과 지옥을 수십 번 오갔으며 그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의 죽음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엄마는 교수님과 달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화장실도 스스로 가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남편도 딸도 알아보지 못하는 때가 대부분이다. 한 평도 채 되지 않는 환자용 침상, 그것이 엄마가 자유로이 쓸 수 있는 공간의 전부다. 가끔 내가 휠체어를 태워 밖으로 나가곤 하지만 엄마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노화. 그것 말고는 이 상황이 발생한 이유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다. 일은 그저 갑작스레 일어났고 이후 엄마의 상태는 돌이킬 수 없었을 뿐이다.




엄마가 생전에 어떻게 죽기를 원했는지에 대해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래서 엄마가 두 번째로 중환자실에 들어가 뇌파가 나오지 않았을 때 연명치료를 중단하자고 했던 의료진의 말에도 쉽게 그러자는 결정할 수 없었다. 가끔 ‘그때 엄마는 내가 자신을 이제 그만 보내주기를 바랐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설사 그랬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러자’며 쉽게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엄마의 의사를 존중했을 것 같긴 하다.


올해 나의 생일날, 나는 장기기증 신청을 해 두었다. 만약 내가 암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나의 장기기증 신청은 무의미해질 것이지만 혹시 모를 불의의 사고가 생긴다면 떠나면서도 누군가는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그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또한 내년 나의 생일이 돌아오면 나는 병원에 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신청할 것이다. 내 나이가 65세 이후라면 인공호흡기도 승압제도 투석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신청할 것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두더라도 내가 원하는 죽음을 맞이할 확률은 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언젠가 내가 가야 할 날이 가까워져 오면 미리 써 둔 의향서 덕분에 나의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나를 보내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죽음에 대한 고민 그리고 준비. 엄마를 통해 나는 세상에 태어났으며 세상을 살아갈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이제 나는 엄마를 통해 이 세상과 어떻게 이별하면 좋을지에 대해 배운다. 이것이 그녀가 내게 물려준 가장 커다란 유산이 아닐까.


노화 그리고 그로 인한 질환은 내가 선택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곳에 닿기까지의 삶에는 분명 나의 몫이 있을 것이다. 나는 노년에도 자립적인 삶이 가능했으면 좋겠다. 그러니 운동만큼은 결코 놓지 않고 꾸준히 해 나갈 것이다. 다행히 나에겐 달리기가 있다. 근력운동도 조금씩 시작해 볼까 한다. 무엇보다 현재를 즐기고 누리며 살리라.


"엄마의 딸로 태어나는 행운 덕에 나는 무척 행복한 삶을 살고 있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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