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은행잎이 수놓은 거리

by Henry




본색을 잃은 가을 거리에는

노란 은행잎이 아니라 초록 은행잎으로 넘치고

늦가을의 높은 기온과 곧바로 뒤이은 한파

기상이변은 가을을 영영 못 보게 만들지도 몰라



초록 은행잎의 가을

웬 초록 단풍잎이 이리 수북이 쌓였을까? 일요일 아침, 사람 발길 끊긴 버스 정류장에 수북이 쌓인 초록 은행잎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얀 벚꽃 지면 봄은 한참 멀어지고, 가을 떠난 자리에는 노란 은행잎이 뒹군다. 계절은 늘 그렇게 다시 온다는 약속의 증표를 남겼다.


올가을은 어째 이상하다. 단풍이 예년보다 못하다는 소리는 해마다 나오는 이야기라 대수롭지 않다. 내년 가을은 제 색을 찾을 거라고 위안하지만, 땅 위에 뒹구는 초록 은행잎은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은행잎은 미처 결별을 준비하지 못하고 늦더위 뒤에 몰아닥친 한파에 혼미했나 보다. 노란색을 채 피우지 못한 은행잎은 순교자처럼 이른 초록의 생을 마감했다.


본디 태양이 멀어지고, 햇살이 옅어지면 가을이 본색을 드러내는 법이다. 사계절이 분명한 우리나라는 10월 중순에서 11월 중순까지 한 달 바짝 산과 들판, 그리고 거리마다 울긋불긋 단풍이 물든다. 그런 날이면 사람들의 마음에는 온통 화려한 가을 색이 배고, 연인들의 눈동자는 천연색 가을이 비친다.


그렇듯이 해마다 이맘때면 떨어진 은행잎들이 거리를 온통 노란색으로 색칠한다. 늦은 가을비라도 오는 밤이면 거리는 노란 물감통을 풀어놓는다. 멀어진 햇살을 견디지 못한 은행나무는 매정하게 잎들을 떨구고, 긴 겨울밤 홀로 날 채비를 마친다. 그런 날이면 무작정 거리를 걷고, 은행잎을 모아 책갈피에 꽂는 감성이 솟아난다. 노란색 감성은 아득한 기억 속에서 노란색의 추억으로 살아 있다.


올해 10월 말, 찬바람은 맹렬한 기세로 은행나무를 흔들었다. 이른 겨울이 온 걸로 착각한 나뭇잎은 한기에 몸을 떨었다. 116년 만에 가장 높은 11월 초, 태양은 철이 뒤늦은 더운 햇살을 뿌렸다. 그 바람에 나무는 겨울이 더디 올 거라 착각했나 보다. 긴 겨울을 날 채비를 차려야 하는 나무는 혼란한 계절 탓에 초록색 광합성 작용을 부추겼다.


여름과 겨울 사이의 짧은 시간

거리마다 초록 은행잎들이 가득한 까닭은 기상이변 탓이라고 한다. 과학자들은 비정상적으로 높은 기온과 그 후 갑자기 찾아온 한파 탓에 가을이 제 색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도시의 가로수 잎도, 속리산 내장산의 단풍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한숨짓는다. 애꿎은 날씨 탓에 미완의 가을 감성은 과학자의 논리적 해석을 불러왔다. 이제 기상이변은 계절의 순환마저 엉클어지게 했고, 그 바람에 해가 갈수록 가을은 본색을 잃어간다.


내년 가을은 제 색을 드러낼까? 이러다간 온 산이 붉게 물드는 가을 산은 영영 못 만날지도 모른다. 단풍으로 아름답게 물드는 풍경은 빛바랜 사진이나 옛이야기 속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여름과 겨울 사이가 짧아지면, 가을 들어설 자리는 더 좁아지겠지. 여름보다는 먼, 겨울보다 가까운 이 계절을 앞으로 뭐라고 불러야 할까? 끝내 이름마저 잃어버리고, 여름과 겨울 사이의 짧은 한때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생은 어떤가? 미처 제 색깔을 펼쳐보지 못하고 조락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강호에 숨은 실력자와 재야의 고수들은 자기 색 드러낼 날을 학수고대한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햇살을 만나지 못하고, 때맞은 계절과 인연이 닿지 않는다면, 그저 무성한 초록으로 생을 끝낸다.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고 성큼성큼 제 길을 간다. 어찌하랴, 제 본색을 드러낼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의 삶은 애달프기만 하다.


그대는 화려한 본색을 펼쳤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행복한 사람이다. 제 색을 피우지 못한 은행잎은 내년 가을의 본색을 기대할 수 있다. 초록 은행잎이 내년 가을에는 더 나을 거라는 희망을 품듯, 우리 삶도 제 본색의 꿈을 꾸는 것도 좋다. 낙심하지도 말고, 포기하지도 말자. 아직 우리 생의 계절은 끝나지 않았고, 계속 순환할 것이니 화려한 색의 시간을 기대하자. 끝내 기회가 없을 거로 지레 서러워 말고, 꿈을 꾸자. 꿈마저 없다면, 그게 더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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