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음은 어둠에서 비롯된다.
『채근담(菜根譚)』 24편은 '밝음과 어둠'이, '깨끗함과 더러움'이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가 존재할 수 없는 그런 관계다.
"굼벵이는 더럽지만, 매미로 변하여 가을바람에 맑은 이슬을 마시고,
썩은 풀은 빛이 없지만, 반딧불로 변해서 여름밤을 빛낸다.
깨끗함은 항상 더러움에서 나오고 밝음은 항상 어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채근담의 글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 글도 대구로 이루어졌다. 더러운 굼벵이와 맑은 이슬을 마시는 매미, 썩을 풀과 아름다운 반딧불, 깨끗함과 더러움을 비교한다. 서로 대조되는 것을 놓고, 어느 한쪽을 더 강조하는 대비 효과를 보인다. 약한 쪽을 더 약하게 하거나 강한 쪽을 더 강하게 표현하는 기법이다. 대개 약한 쪽을 죽이면 강한 쪽이 더 산다.
사람들이 더럽다고 꺼리는 굼벵이가 자라 매미가 된다. 매미는 한여름 신나게 노래하다 가을바람을 맞으면 맑은 이슬까지 마신다. 추한 모습에서 매미로 변신하여 맑은 이슬을 마시는 고귀한 몸이 된 것이다. 지구상에는 약 3,000종의 매미가 있다. 이들은 종류에 따라 7년, 13년, 17년을 땅속에서 굼벵이로 살다 매미가 된 후 1주일에서 3주일 살고 죽는다. 땅속의 긴 기다림과 땅 위의 짧은 생을 사는 것이 매미의 운명이다.
옛사람들은 썩은 풀이 변하여 반딧불이 된다고 믿었다. 공자(孔子)의 『예기(禮記)』 '월령편(月令篇)'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며, 귀뚜라미는 벽 속에 있고, 송골매 새끼는 나는 연습(練習)을 하며 풀이 썩어 반딧불이가 된다.”라고 나온다. 반딧불의 알이 썩은 풀더미 속에서 떨어진다. 반딧불은 썩은 풀을 먹고 자란다. 다 자라고 난 여름밤의 반딧불은 무척 아름답다. 칠흑의 어둠 속에서 마치 별똥별처럼 날아다닌다. 썩은 풀더미의 아름다운 변신이다.
더러움에서 나오는 깨끗함 중에 으뜸은 연꽃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뿌리를 내려 예쁜 꽃을 피운다. 아무리 더러운 물속이라도 순결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환경이 나빠도 훌륭하게 자라는 사람을 연꽃에 비유한다. 연꽃이 피면 물속의 시궁창 냄새는 사라지고 향기가 연못에 가득한 계향충만(戒香充滿)이다. 더러움 자체가 깨끗함으로 변한다는 말은 아니다. 더러운 환경 속에서 깨끗함이 자란다는 뜻이다.
프랑스의 고고학자이자 미술관 큐레이터인 안느 바리숑(Anne Varichon)은 빛과 어둠을 미학적으로 표현했다. "빛과 어둠이 태초의 심연을 부수고 등장했을 때, 세상은 혼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시간의 끝, 공허는 어둠으로 돌아갔다. 어둠은 태고의 혼돈과 관련이 있다. 어둠은 그 속에 숨어있는 위험과 함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검정은 죽은 이라는 영원한 밤을 떠오르게 한다. "
우주가 탄생한 태초에는 빛조차 없었다. 우주에서 빛이 태어난 것은 약 138억 년의 빅뱅 후 38만 년이나 흐른 뒤다. 이전까지는 우주의 밀도가 너무 높고 뜨거워 빛이 그사이를 뚫고 나올 수가 없었다. 이렇다 할 에너지원이나 발광원이 없었다. 완전한 암흑 상태였다. 우주가 충분히 식고 밀도가 낮아지면서 빛 알갱이인 광자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채근담(菜根譚)』이 말한 것처럼 어둠에서 빛이 비롯되었다.
다 빈치의 스푸마토와 카라바조의 테네브리즘
카라바조(Caravaggio)는 그림 속에 어둠과 빛의 극명한 대비를 활용했다. 북이탈리아의 베르가모 근교 카라바조에서 태어난 그는 자신의 본명 미켈란젤로 메리지(Michelangelo Merisi, 1571~1610)보다 고향 이름을 딴 카라바조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회화 역사에 길이 남는 명암법을 개척한 화가로 평가 받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색과 색, 선과 선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부드럽게 처리하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창시했다. 쵸크나 목탄으로 그림을 그린 후 손가락 또는 천으로 윤곽선을 문질러 흐릿하게 만들어 애초에 선에 의해 규정지어진 사물의 형태를 부드럽게 만든다. 그 이전의 그림이 선과 선의 명확한 경계를 중시했다면, 다 빈치 이후의 유화가 발달하면서 색과 색의 혼합으로 외곽선을 사용하지 않고도 깊이 있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걸작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가 스푸마토 기법으로 탄생했다.
반면에, 카라바조는 어둠을 배경으로 깔고 중심인물을 밝게 칠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마치 연극 무대에서 주인공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배경을 어둡게 만들어 주인공의 얼굴과 심리 상태를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방식과 같다. 카라바조는 이처럼 어둠을 깊게 하고 밝음을 강조함으로써 보는 사람의 감정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테네브리즘(Tenebrism) 기법을 개척했다. 카라바조의 회화 방식은 당시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런 그의 회화 기법은 루벤스, 렘브란트 등 후대의 화가들에 큰 영향을 남겼다.
《성 마테오의 소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카르바조는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를 캔버스 위에 구현했다. 빛으로 드러나는 부분을 사실적으로 드러냈다. 배경이나 기타 주제와 관련이 없는 대상을 모두 어둡게 칠했다. 카르바조의 빛과 어둠의 대비를 강조한 화풍은 로마 미술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참신한 시도에 매료되었다. 어둠을 더 어둡게 함으로써 밝음을 도드라지게 했다. 덕분에 빛을 받는 주인공의 동작과 표정이 생생하게 보인다.
카라바조의 삶, 밝음과 어둠의 극렬한 대비
카라바조는 회화 역사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그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한 추기경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매우 불안정한 성격으로 가는 곳마다 싸움을 일으켰다. 심지어 살인을 저질러 도망자 신분이면서도 사람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추기경 등 고위 성직자들이 그의 재능을 살리기 위해 사면해주기도 했지만, 너무 사고를 많이 쳐 뒷수습이 감당되지 않을 정도였다. 카라바조의 삶 자체가 밝음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라 할 수 있다. 그 자신이 개척한 테네브리즘 만큼이나 깊은 어둠의 삶을 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침묵은 매력적이다. 죽음보다 더 깊은 어둠과 침묵은 우주 공간에 존재한다. 질량도 중력도 없는 무한의 깊은 어둠이 그곳에 있다. 모든 것이 사라진 곳, 시간과 공간마저 사라지는 삼켜버린 블랙홀(black hole)은 절대의 침묵이자 어둠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밝음은 빛난다.
빛은 어둠을 먹고 밝게 빛난다. 밝음은 탁함이 있어야 도드라져 보인다. 더러운 환경에서 자라는 깨끗함이 돋보인다. 세상은 늘 밝음만 있는 것도 아니고 늘 어둠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밝음과 어둠, 빛과 그림자, 깨끗함과 더러움이 교차한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없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다. 그러니 지금 내가 비록 터널 속 어둠에 있더라도 곧 밝은 빛을 볼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도 좋다. 그때 맞는 빛남은 너무 소중할 것이다.
인생도 고통과 불행이 있어야 행복이 돋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고통을 맛보라는 것은 아니다. 이미 힘든 삶을 살고 있다면 언젠가 밝음이 오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견뎌야 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솔로몬 왕자의 지혜를 믿자. 어둠이 깊을수록 밝음은 더 빛날 것이다. 고통이 행복을 더 소중하게 만들고, 어둠은 밝음을 더 빛나게 만든다. 참고 견디는 삶은 결국 축복받는다는 희망을 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