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색의 유혹】
분홍 철쭉과 초록 담쟁이의 전투
"담벼락 위를 초록으로 물들이자!!“
"정상을 내줄 수 없다. 분홍을 사수하라!!"
겨우내 담쟁이의 앙상한 줄기가 얼기설기 담벼락에 붙었다. 살을 에는 찬바람에 철쭉도 잔뜩 몸을 웅크렸다. 봄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담벼락은 조용했다. 날이 풀리자 담쟁이의 잎들이 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철쭉도 어느새 분홍 옷으로 갈아입었다. 담벼락의 평화는 깨졌다. 담쟁이의 진격과 철쭉의 방어로 온종일 벽이 시끌벅적하다.
따뜻한 봄바람에 녀석들이 본색을 드러내자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졌다. 담벼락을 모두 차지하겠다는 초록 담쟁이와 정상을 내줄 수 없다는 분홍 철쭉이 치열하게 다툰다. 분홍 철쭉이 차지한 고지를 향해 담쟁이의 초록 군사들이 떼를 지어 벽을 탄다. 끈질긴 담쟁이는 벌써 철쭉의 턱 밑까지 치고 올랐다.
담벼락은 온통 초록으로 물들였다. 초록 담쟁이의 공격이 매섭지만, 분홍 철쭉의 방어도 만만치 않다. 이들이 펼치는 색투(色鬪)가 봄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철쭉의 분홍은 만개하고, 담쟁이의 초록은 선명해진다. 이들의 싸움이 쉬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누가 끝까지 버티느냐가 이 싸움의 승패를 좌우할 것이다. 색투든, 화투든, 전투든 세상의 모든 싸움은 버티는 자가 이기게 돼 있다.
무채색의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면 화려한 색의 전쟁이 펼쳐진다. 3월이 오면 개나리의 노랑이 발걸음도 씩씩하게 진군한다. 곧이어 진달래의 연분홍과 라일락의 보라가 세력을 확장한다. 이때쯤이면 목련의 하양이 순백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철쭉의 분홍이 힘을 쓰다 장미의 빨강에 자리를 양보한다. 계절의 여왕 5월이 붉은 장미 왕관을 쓰면 색의 전쟁은 끝난다.
색은 보기에만 좋은 게 아니라 정서적 치유에도 도움을 준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사람들 마음이 들뜬다. 기온이 올라 옷차림이 가벼워진 탓도 있지만, 아무래도 색이 주는 화사함도 한몫한다. 스트레스를 받아 마음이 무거울 때 화사한 색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무성한 초록 잎은 청량한 기분을 주고, 분홍 꽃잎은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 준다.
빛이 없으면 색도 없다.
색은 어디서 왔을까 궁금하다. 철쭉의 분홍과 담쟁이의 초록은 원래부터 몸속에 있었던 것일까? 한때 사람들은 사물은 고유의 색을 갖고 있고, 자기 색을 스스로 밖으로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담쟁이와 철쭉의 몸속에는 초록 색소와 분홍 색소가 있는 것은 맞다. 때가 되면 이들 색소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지만 색이 저절로 빛을 발해 사람 눈에 비치는 건 아니다.
안타깝지만 사물은 스스로 색을 내지 못한다. 철쭉이 스스로 분홍을 발현한다면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다. 담쟁이의 초록은 아무리 어두워도 스스로 초록이 빛나야 한다. 아쉽게도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색을 볼 수 없다. 별빛도 없고, 달빛도 숨은 어두운 밤에 사물의 색을 구분할 재간이 없다. 그 말은 색이 스스로 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분홍 철쭉과 초록 담쟁이의 다툼을 보는 것은 빛이 있기 때문이다. 빛이 없다면 세상에는 어둠만 존재한다. 어떤 사물도 짙은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빛이 있을 때 색들은 아름다움의 향연을 펼치고, 세상이 제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는 것도, 잠자는 아이의 이마에 입맞춤하는 것도 빛 덕분이다.
빛이 없으면 색이 없고, 색이 없으면 세상은 온통 어둠이다. 빛이 있다고 해도, 빛 속에 색이 없었다면 세상은 온통 투명하다. 빛 속에 색이 없다면 밝음과 어둠도 구분할 수 없고, 빨강과 보라도 볼 수 없다. 세상은 그저 투명한 백색광만 쏟아지는 이상한 나라가 됐을 것이다. 날마다 벌어지는 분홍과 초록의 색투(色鬪)를 볼 수 있게 해준 빛에 감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