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 앱의 1패
“결혼식 시작할 때는 비가 그쳐야 할 텐데...”
어제 금요일 밤 6시 야외결혼식장에서 신부 아버지가 말한다. 꽤 유명한 결혼식장이라 예약하기 하늘의 별 따기다. 무려 1년을 넘게 기다린 결혼식 날, 강풍에다 세찬 비가 내린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혼주들의 마음도 몰라주고 하늘은 무심히 비를 뿌린다. 내리는 비야 어쩔 수 없지만, 식을 진행할 때만이라도 비가 그쳤으면 하는 신부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이 절절하다.
'비 오는 날 결혼하면 잘 산다'는 옛말이 있다. 농업을 업으로 할 때는 비가 오면 땅이 생기를 찾는다. 촉촉이 비에 젖은 땅은 곡식을 잉태하고 풍성한 알곡을 맺게 한다. 덤으로 세상의 먼지를 씻어내듯 온갖 근심을 씻는다는 뜻이 담긴 말이니 덕담으로 여길만 하다. 이러니 농촌에서는 비 오는 날 결혼하면 잘 산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아쉽지만 어제같은 야외 결혼식에는 그저 위안하는 말로만 들린다.
“가만, 일기예보를 보니 6시에는 비가 그칠 것 같아”
이게 뭔 생뚱맞은 말씀인가. 얼마나 애타 탔으면 말도 안 되는 바람을 이야기할까. 차마 안쓰럽고 민망해 듣는 내가 다 미안하다. 여전히 빗줄기가 거세다. 불과 두 시간도 안 남았는데 비가 그친다고? 이걸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혼주의 속 타는 마음이야 이해 못 할 바가 아니지만, 그래도 바랄 걸 바라야지. 그런 생각에 나도 애가 탄다.
“이보게!!! 스마트 폰 일기예보 앱을 봐. 지금은 비 올 확률이 80%지만, 식이 시작하는 6시에는 30%로 뚝 떨어지잖아.”
긴가민가하고 내민 스마트폰을 쳐다봤다. 아니 이럴 수가, 사실이다. 80%의 확률이 이어지다가 6시에는 30%로 떨어진다. 그 후 7시부터 다시 80%의 확률로 비가 내린다. 어찌 이게 가능할까. 이렇게 빗방울이 굵은데 6시가 되면 비가 잦아진다니 믿기지 않는다. 아, 진짜 이렇게만 된다면 신부의 하얀 웨딩드레스가 비에 젖지 않겠구나. 덩달아 나도 그런 바람을 갖는다.
혹시나 해서 내 스마트 폰의 일기예보를 봤다. 이런, 밤늦도록 비 올 확률 80%다. 이거 참 말을 할 수도 없고 입맛만 다신다. 혼주는 연신 스마트 폰 일기예보를 확인한다. 곁눈질로 보니 신부 아버님 폰은 갤럭시다. 기종이 달라서 그런가? 일기예보 앱이 서론 다른 예측을 한다. 알고리즘이야 비슷할 텐데 이게 말이 되나. 아이폰의 날씨 앱은 여전히 신부의 웨딩드레스가 비에 젖을 거라고 확신한다.
6시가 다가오자, 이게 웬일인가. 비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한다. 하객들이 하나둘 건물 사이에 마련된 야외식장에 모여든다. 호텔이 마련해 준 하얀 우산을 하나씩 들고 선다. 자리가 정리되고 6시 10분에 식이 시작됐다. 신기하게도 비가 정말 가는 보슬비로 바뀌었다. 비가 오는 걸 못 느낄 정도로 약해졌고, 우산을 받쳐 들지 않고도 견딜만하다.
신부 아버님의 간절한 기도가 통한 걸까.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신부의 순백 웨딩드레스가 비에 젖지 않는다. 신랑 신부 두 사람의 앞길을 축하하는 걸까. 1시간 가까운 식 내내 신랑 신부는 턱시도와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당당히 섰다. 그것도 우산도 없이 말이다. 가끔 도우미들이 우산을 받쳐 주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 잠깐이다. 아, 하늘이 이들을 크게 축복하나 보다.
조금 낯간지럽긴 해도, '비 오는 날 결혼하면 잘 산다'는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식이 진행되는 시간 동안은 조용하던 비는 식이 끝나자마자 다시 거세졌다. 올해의 풍년 약속을 지키려는 듯 비는 세차게 내렸다. 뭐 어때, 이제 식은 다 끝났으니 말이다.
비에 젖은 가수 하동균의 목소리
상상이 가는가? 비와 돌풍이 예고된 날, 딱 식이 진행되는 그 시간만 비가 소강상태를 보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확률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런 우연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렇지만 혼주의 애타는 마음을 지켜본 나도 기쁘기가 한량없다. 확률이 안 맞으면 어떤가. 아이폰 앱이 갤럭시 앱에 의문의 1패를 당하면 어떤가. 혼주들과 하객들 모두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데 딱 좋았다.
‘날씨가 크게 부조(扶助)한다'라는 말이 있다. 큰 행사 날 날씨가 화창할 때 하는 말이다. 결혼식이 있는 날 날씨가 맑으면 다들 기분이 좋다. 아쉽게도 어제는 종일 비가 내렸다. 그나마 식이 진행되는 동안 비가 잦아들었으니 이 또한 큰 부조(扶助)가 틀림없다. 그것도 하늘이 내린 축하 선물이니 이보다 더 바랄 게 뭐가 있을까. 신랑 신부의 앞날에 꽃길만 있길 기원해 본다.
덕분에 축하 공연도 제대로 감상했다. 신랑이 젊은 사업가가 그런지 발이 넓다. 친한 가수들이 와서 노래를 불렀다. 그 가운데는 하동균도 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신랑과 가끔 술잔을 나누는 사이라고 한다. 젊은 하객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나도 그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내밀었다.
비 오는 야외 결혼식장에서 노래를 부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말이다. 그런데 참 잘 부른다. 굵게 내리던 빗줄기가 잦아든 야외 결혼식장에서 듣는 윤종신의 '오르막 길'이 너무 멋지다. 물기에 젖은 하동균의 목소리가 식장을 휘감는다. 이래서 가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하동균 말고도 두 팀의 축가가 있었다. 그들의 노래 실력도 만만치 않다. 역시 프로는 프로다. 결혼식장 축하를 많이 들었지만, 어제처럼 귀가 호강하는 일은 잘 없다. 난다 긴다 하는 아마추어들의 노래는 한계가 있다. 노래를 직업으로 부르는 사람과 가끔 취미로 부르는 노래의 차이가 확연하다. 물론 아마추어 중에서도 노래 실력이 뛰어난 사람도 많다. 어제는 비가 내려 그들의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서 그런 걸까.
잠시 그쳐준 비가 가져온 행운이었다. 생각해 보니 참 로맨틱하고 낭만적이다. 내리는 듯 마는 듯이 하는 비에 마당에 선 하객들은 하얀 우산을 손에 쥐었다. 처마 밑에 놓아둔 의자에 앉은 사람도 편안하게 식을 지켜본다. 꽃잎 위의 물방울은 불빛에 반짝이고, 나뭇잎은 초록색 빛을 뿌린다. 사람들은 신랑 신부를 축하하는 그들의 노래에 흠뻑 젖는다.
살면서 세상일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어제 결혼식도 그랬다. 결혼식이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빗줄기가 굵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실내로 들어왔다. 실내에 차려진 만찬장에 모였다. 야외 식장으로 이어지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음악을 듣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첼로의 묵직한 선율을 타고 비와 음악이 내렸다. 비가 아니었으면 어찌 이런 풍경을 맛볼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