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80년대생이라면 영턱스 클럽의 '정' 노래와 초코파이 '정'이 떠오를 것이다. 정(情)이라는 것이 젊은 이들의 뜨거운 사랑이든 달콤한 초콜릿과 지구 한 바퀴 걸어도 살이 빠지지 않는다는 마시멜로를 포함하고 있는 간식이든지 간에. 그 단어가 풍기는 고유의 정겨움과 따뜻함이 있다. 그 단어의 따스함 만큼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이 많다, 예전에는. 필자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더라도 학교 끝나고 집에 갔을 때 엄마가 없으면, 동네 친구집에 가서 놀다가 친구 가족과 저녁 먹는 일도 다반사였다. 어디 이뿐이랴. 어린 남동생을 집 앞 슈퍼에 맡기고 볼일 보고 오더라도 무탈하게 집 앞 골목에서 동네 친구들과 재미있게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네 어른분들이 준 간식도 먹으면서. 또한 촌에서 할머니께서 채소를 보내시면 가족이 먹을 만한 양보다 항상 많이 보내 주셔서 위층, 아래층과 나눠 먹기도 했었다. 그런 정이 넘치는 시절을 지나 지금을 보면 동네 반상회도 딱히 없을뿐더러 아파트라는 한 건물 안에서 각자 살아가기로애쓰는 듯하다. 글쎄.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어서 그런가. 집에 대한 친근함이 덜한 반면에 위층, 아래층이 우리 집을 찾아오지도 않는데 우리도 굳이 찾아가 띵동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게다가 여기는 육지가 아닌가. 뭐 육지는 다른가 싶겠지만 빽빽한 아파트와 빌딩 숲 사이로 낡은 빌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을 보자 하면 조금은. 고향과는 다르긴 다르다고 느끼는 바. 육지에 거주하지만 아직 육지 사람이 되지 못한 채. 이곳에서 낯섦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어렸을 때 보던 동화책에서는 흔히 서울 사람들은 고층의 아파트에서 사는 '깐깐하다'의 대명사였다. 반면 제주 사람들은 '툴툴하다'의 대명사다. 제주 사람의 '툴툴하다'가 생소하다면,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이병현 역을 관찰해 본다. 이병현 배우의 '동석' 인물이 제주 사람의 특징을 그대로 여실히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살펴보자면, 평소 무심한 표정으로 자기 일을 묵묵히 기꺼이 해낸다. 또한 그에게 닥치는 여러 불편한 상황과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도 요동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한다. 그러다가 분을 참지 못할 때, 그동안 참고 있었던 분노를 격정적인 활화산처럼 뿜어낸다. 앞뒤 안 가리고 활활. 딱, 제주 사람.
이 툴툴함을 제주에 사는 외지인들은 경험했으리라. 딱히 불친절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엄청 친절한 것 같지는 않은 말투와 행동. 뾰로통한 표정이지만 행동은 예의 바른듯한. 요즘 말로 츤데레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글쎄, 츤데레라는 말도 요즘 말이라 그리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다. 여하튼 같은 구역인 '제주시', '서귀포시'라고 불리는 지역 안에서도 '시', 와 '촌'이라고 불리는 구역이 따로 나뉘어 있으며. 이들의 불친절한 말투(사실은 사투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럴 거다.)와 행동은 육지 사람으로 하여금 제주 사람에 대한 오해를 불러들이기에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 사람들을 깊이 들여다본다면 그들의 속이 깊음을 알 수 있다. 정(情)을 한 번 주기는 어렵지만, 정을 한번 주기로 마음먹었다면 그것은 상대에게 모든 것을 오픈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 친해지면 그들의 속사정을 알고 싶지 않은 것조차 낱낱이 알게 될 것이다. 만났을 때 어색한 기운이 감돌지라도 그 제주인은 상대방을 속 깊게 헤아리고 챙겨준다. 그때 제주 사람의 속 깊은 정(情)을 느낄 수 있으리라.
퍼주고 퍼주는 제주 사람을 본 적 있는가. 쉽게 볼 수 있다, 겨울에. 이 시즌이 되면 제주의 어느 곳을 가든지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동백나무와 귤나무. 동백나무는 제주 4.3 사건의 상징 꽃으로서 강요배의 작품 '동백꽃 지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눈 위에 붉은 꽃송이가 툭 떨어진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사실 겨울의 제주 여행의 필수 코스는 '동백 군락지'다. 흐드러지게 떨어진 꽃송이를 보며 예쁘다,라고 겨울의 동백꽃을 칭송하지만. 폭력 앞에 스러진 주검 더미, 흰 눈을 붉게 적신 피의 모습을 빗대어 4.3 사건을 상징하는 꽃이다.
귤나무는 어떤가. 여기가 촌이구나, 알 수 있는 것은 길가에 돌담 너머 귤나무가 보이는 곳이다. '미깡'이라 불리는 귤은 제주의 특상품으로서 조선시대 때 왕에게 올려지는 진상품이었다. 그만큼 제주의 모든 사람들이 귤나무를 키웠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집에 귤나무가 없는 것은 확실하다. 안타깝게도 귤나무가 없는 제주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귤을 사 먹어본 적은 없다. 어떻게 제주에서는 흔하지만, 집에는 귤나무가 없고, 귤을 사 먹어본 적이 없다,라는 것인가. 바로 퍼주고 퍼주는 이웃들의 정(情)이 있기 때문이다.
귤이 나오는 시점은 우리 집 베란다, 현관에 귤 컨테이너가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귤을 한 컨테이너, 한 마대로 퍼주고 가신다. 누가 퍼주느냐. 바로 옆집, 앞집, 윗집 그것도 아니면 동네 사람 누군가가. 아니 어떻게 귤을 한 봉지도 아니고 한 컨테이너, 한 마대로 줄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이 귤은 제주어로 '파치'. 귤을 상품 선별할 때, 크기가 크거나 작거나 스크래치가 난 못난이 귤은 상품 가치가 떨어져서 파치로 분류된다. 맛은 똑같다. 똑같은 나무에서 나온 귤이니까. 단지 상품이 아니어서 팔지 못하기에 모아둔 파치 귤을 이웃들에게 먹으라고 나눠주는 셈이다. 그래서 한 컨테이너 씩, 한 마대씩 이웃의 집으로 배달된다. 차가운 곳에 두어야 썩지 않기 때문에 주로 현관, 베란다에 세워둔다. 특히 현관에 둔 귤은 집을 나서고 들어오며 하나씩 집어드는 맛이 꽤나 시원하고 상콤하다.
비단 집뿐만이 아니다. 겨울 시즌에 제주 식당 어디를 가도, 식당 입구에 놓인 귤 컨테이너를 만날 수 있다. 그냥 마음대로 귤을 집어가기가 걱정이 되는가. 1인당 1개씩 귤을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걱정 마시라. 식당 주인한테 귤 가져갈게요, 하고서 한아름 가져가도 좋다. 어떤 식당 주인들은 봉지채 가져가라며 주방에서 비닐봉지를 꺼내올지도 모른다. 식당을 방문한 제주 사람은 집에도 한가득 있기에 안 가져가지만, 육지 사람들은 무조건 하나씩 집어 먹게 되어있다. 귤의 양으로만 승부할 테냐. 아니다. 귤 종류도 많다. 노지귤, 하귤, 한라봉, 레드향, 천혜향, 황금향, 타이벡, 홍매향. 종류별로 귤의 맛도 다양하다. 어떤 귤을 제일 좋아하는가. 개인적으로는 아랫집에서 먹으라고 갖다 줬던 레드향이 제일 맛있었다. 그렇게도 달콤할 수가 있나.
하나의 에피소드는 제주에 거주하는 육지사람들이 겨울만 되면 손이 노랗게 된다. 그 이유인즉슨 워낙 귤을 많이 먹어서 손이 노랗게 변하는 것이다. 웃프지만 그만큼 귤을 퍼주고 퍼주는 제주 사람들의 정(情)이다.
이렇게 귤을 컨테이너, 마대로 받다가. 귤은 없지만 다양한 제철과일이 가득한 육지에 오게 되었다. 낯선 이 공간과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틈에 정(情)이라는 것을 느껴본 것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가볍고 짧은 인사말이었다. 제주 사람들과 반대로 얼굴은 항상 미소를 짓지만 더 이상 말을 속 깊게 드러낸다던가, 행동은 친절하지만 그 친절함 이상 드러내지 않는 뭔가가 있는 듯하다. 내 안의 경계일까. 다칠세라 마음속의 곧추세운 가시일까. 속 깊은 마음의 그 경계마저, 이제 '깐깐하다'에 물들어가는 것인가 싶을 무렵.
▲ 한 카페의 정(情)을 마주하다 ⓒmoonlight_traveler
오래간만에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힘겹게 챙기고 커피숍으로 향했다. 이 동네의 어느 카페를 가서 눈치 보지 않고 조금이나마 조용하게 글을 쓸 수 있을까, 하여 100m여 떨어진 프랜차이즈 카페로 향했다. 그런데 들어서는 순간, 세상에나. 카페 입구에서 만난 컨테이너 박스. 그곳에는 곱디고운 바알간 주황빛의 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주문도 잊은 채 감 컨테이너 앞에 서서 이리도 보고 저리도 본다. 이것은 대체 어떤 상황인가. 이렇게 큰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감을 주다니. 순간 감이 들어간 케이크 홍보인가 싶었지만, 신제품 초콜릿 케이크를 광고하는 포스터 사이에 친절한 메모 종이.
고객님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달하고자 저희 시골에서 재배하고 있는 감(대봉)을 무상으로 드리고자 합니다. (중략) 참고로 대봉은 홍시가 되어야 드실 수 있으며, 농약을 최소화하여 모양이 이쁘지는 않은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어. 머. 나. 시골에서 재배한 감을 고객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 카페에 들어서는 입구에 감을 가지런히 전시해 둔 것이다. 한 개씩 가져가서 드시라고. 감마다 거뭇거뭇 상처가 났지만 얼마나 닦았는지 반들반들 윤이 난다. 육지에서 처음 본다. 리뷰를 써야 주는 무료 음료수도 아니고, 인스타에 인증해야 주는 무료 장난감도 아니며, 얼마어치 이상 구입해야 주는 무료 열쇠고리도 아니다. 신선한 충격. 아. 육지에도 이웃 간의 정(情)이 있구나. 아직 정(情)이 살아있구나. 케이크로 유명한 카페에서 생뚱맞은 감이었지만, 시골에서 농사짓는 모습까지 찍어서 올린 카페 주인장의 따스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어찌나 감사한지. 마음이 몽글몽글 해진다. 내 안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뾰족해진 가시가 수그러들었다. 물론 1인 1감을 챙기지는 않았지만, 글 쓰는 내내 카페 주인의 훈훈한 마음이 이 카페 곳곳에 훈기가 더해지는 듯하다. 비단 뭐 이유 없이 그게 귤이든 감이든, 뭘 주고받아야지만이 이웃 간의 정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렇게 입김이 훌훌 날리고 길도 추위에 얼어붙어 넘어질까 말까 하는 총총걸음에. 어딘가에서, 비록 모양이 이쁘지 않은 파치지만 맛있게 드세요,라는 인심이 넉넉한 모습에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은. 단연코 이웃 간의 정(情)이라 불릴 만하다.
집안은 이리도 고요하고. 창밖의 도로는 차들로 가득 메워지고 혼잡하다. 다들 어디로 가는지.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와 빌딩의 사무실들 사이로 따스한 햇살과 반짝이는 강 윤슬이 눈부신 이 시점에. 각박하고 빽빽하다고 여긴 육지 사람들 틈에서 달콤한 감의 맛을 느껴버렸다. 츄르릅. 입안에서 흐물흐물 거리며 목구멍을 부드럽게 넘어가면서 달콤함과 약간의 떫음을 남기는 달짝지근한 맛.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육지의 정(情)을 만났다. 이리도 달가울까. 마음이 둥실둥실 가벼워지며 입가의 미소가 생글생글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따스한 정(情)을 누군가에게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어제는 친정에서 오늘은 시댁에서 보내주신 귤 택배가 집으로 도착한다. 컨테이너, 마대는 없지만. 귤 한 봉지 가득 챙기고는 윗집, 아랫집, 옆집을 방문해봐야 하겠다고 다짐한다. 육지에서 이웃 간의 정(情)을 마주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