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하듯이 문제를 도려내려고 하면 문제가 더 크게 보였다. 악마에게 복수하려고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다 내가 악마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우울증으로 10년 이상의 세월을 낭비했다. 더 이상 속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답을 억지로 찾겠다고 다시 발버둥 치고 싶지도 않았다.
막상 별일이 없는 날은 과거에 내가 뭐 때문에 힘들었는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글을 쓸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날에는 그냥 책을 읽다가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그때 글을 적었다. 책을 읽다가 어떤 단어를 보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봇물처럼 솟아올랐다. 회피만 하고 묻어뒀던 내 생각을 책을 보며 다시 마주했다.
글을 쓰며 나를 치유하는 시간이 거의 1년이 지났다. 마음이 많이 잔잔해졌다. 마음이 잔잔하니 오히려 글을 쓸 필요를 못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과거에 내가 어떤 글을 썼는지 궁금해서 다시 읽어보기 시작했다. 어두운 마음으로 쓴 과거의 글을 보고 무언가를 크게 깨달았다. 내가 반복적으로 똑같은 패턴으로 어둠에 지배당했다는 사실이었다. 기록은 정직하다. 기록은 과거의 나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내 과거의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마주했다. 처음엔 창피하기도 했지만 이후엔 담담한 마음이 들었다.
어둠은 토할 만큼 토해봤다. 이젠 좋은 글로 내 마음을 채우고 싶었다. 어둠을 없애려고 하면 어둠은 더 커졌지만 희망의 글귀를 붙잡고 희망이 없어도 희망을 외치면 내가 승리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희망만이 나를 살게 한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을 붙잡는 힘이 나를 살게 했다.
음식과 같은 외부적인 것을 붙잡고 희망이라고 우기는 삶을 살다가 이젠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용기를 희망이라 부르고 산다. 희망이 안 보여도, 희망이 없어도 어떻게서든 매일 하루 한 가지 희망은 찾는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내 마음이 좌절에서 극복하는 시간이 줄었다는 것, 내 마음이 울적하면 희망을 한 번 더 외치는 깡다구가 생겼다는 것, 이외에도 내 마음에서 찾을 수 있는 희망은 많다.
과거엔 좋은 집, 좋은 차, 잘난 사람들을 보며 끊임없이 남과 나를 비교하는 내 마음이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비교를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희망이 아니라 나를 좌절시킬 외부적인 대상들을 찾아 헤매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의 초점을 비교와 좌절에서 아무거나 붙잡고 희망으로 우기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라도 삶의 마스터키를 쥐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희망이 안 보여서 아무거나 붙잡고 희망이라 우겼습니다.
이젠 내 안에서 희망을 찾고 희망을 우기고 희망을 붙잡습니다!'
'희망은 절망을 몰아낸다'는 원리를 알면 절망은 쉽게 퇴치됩니다.
절망감이 엄습할 때 절망을 상대로 씨름을 해 가지고는 절망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절망이 몰려올 때 절망을 보지 않고 희망을 붙들면 절망은 발붙일 틈이 없게 됩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를 '대체의 법칙'으로 밝힐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 기초를 둔 이 원리는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사람의 뇌는 동시에 두 가지 반대 감정을 가질 수 없다.
곧 사람의 머리에는 오직 한 의자만 놓여 있어서 여기에 절망이
먼저 앉아버리면 희망이 함께 앉을 수 없고,
반대로 희망이 먼저 앉아 버리면 절망이 함께 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방금 절망과 희망의 관계를 '한 의자의 법칙'에서 양자택일의 관계로 설명했습니다.
어찌 들으면 단 한 번에 희망을 가져서 한 방에 절망을 날리라는 뜻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