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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럭키걸 Nov 13. 2024

희망할 게 없는데 희망하라고?

단어가 주는 힘



이번주는 정말 혼란스러운 한 주였다. 희망이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위기였지만, 그간 써두었던 글이

나를 지탱했다. 그동안 내가 써온 글이  내게 말했다.


'일단 버텨'


다시 아무거나 붙잡고 일단 버티려고 해 봤으나, 이번엔 갈비도 가리비 사진도 전부 소용이 없었다. 늘 그랬듯이 위기일 땐 뇌가 마비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머릿속에 떠오른 유일한 글자는 '희망'이라는 단어, 이것 하나뿐이었다. 별수가 없으니 희망이라는 두 글자만 붙잡고 버텨봤다.


'희망희망희망

금방 또 내 마음에 희망이 가득 찰 거야

희망희망희망...'


나에게 주문을 걸듯,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를 마음속에 마구 휘둘렀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뛰었다. 뛰기 싫은 날은 블로그에 글을 써서 나를 설득했고 사람들의 응원을 받고 다시 힘을 내서 나갔다.


뛰고 나니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상황들이 남의 일처럼 조금은 멀리 떨어져 보였다. 승리했다는 기쁨과 살았다는 안도의 감정이 몰려왔다. 승리는 남을 이길 때 보다 절망을 이겼을 때 성취감이 더 크다는 걸 깨달았다.


달리기를 하면 희망을 우기는 체력이 생겼다. 마음 근육은 내 체력과도 연관이 있었다. 오늘도 달렸다. 나는 오늘도 승리했다. 남을 짓밟고 이기려는 마음으로 얻은 승리가 아닌 절을 짓밟고 이긴 승리가 더 짜릿했다.


성공하려면 매번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하는 싸패(사이코패스)가 돼야 하는 줄 알았지만 30대의 내가 정한 진짜 성공은 희망이라는 두 글자 그 자체를 붙잡고 버티고 나아가는 힘이다.


이번 주는 희망할 것이 잘 보여서 희망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희망이라고 우겼다. 다음에 나는 어떤 것을 붙잡고 이 어둠을 몰아낼까? 궁금하다. 어둠을 몰아내기 위한 방패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글을 적는다.





차동엽 신부님께서 쓰신 책 '희망의 귀환'에서 건져 올린 보물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사람에게 물어보라


몸싸움에만 맷집이 있는 게 아니다.

절망이라는 녀석 앞에서도 맷집이 좋으면, 웬만한 고충은 가뿐하게 버텨낸다. 외부로부터의 어떤 공격도 거뜬하게 견뎌낸다. 그렇다면 맷집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한 남자가 극심한 절망의 늪에 빠졌다. 사정은 이러했다. 평생 모은 돈을 사업에 투자했다가 모두 날려버렸고 설상가상으로 부인은 회사로부터 해고통지를 받았던 것!


그는 조언을 청하기 위해 평소 존경하던 유명 작가를 찾아갔다.

작가는 거울 앞으로 데려가 거울에 비친 그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당신을 일으켜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차분히 관찰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해 보고, 당신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물론,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자신 안에서 재기의 발판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꼭 실패 때문이 아니라도 유난히 벅찰 때가 있다.

모든 것을 놓고 싶을 때, 의욕도, 꿈도, 희망도 다 접고 싶을 때!


이럴 땐 심기일전이 필요하다. 휴식이든, 치유든, 충전이든 무엇이라도 소용이 된다면 취해 보는 것이다.


그러노라면 슬슬 자신에 대한 신뢰가 회복될 것이다.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재기의 기지개를 켤 수 있는 힘이 새로 길러졌어",

"이 정도면 무엇이든 감당할 수 있겠어" 하면서...




둘 중 하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 '불안'이 도약의 계기가 된다고 간파했다.

그 계기를 죽이는 것이 절망이며, 살리는 것이 희망이라는 말이다.


그는 사람에게는 심미적 삶, 윤리적 삶, 종교적 삶, 이렇게 3단계 삶이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불안이 앞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우선 사람은 본능적으로 심미적인 삶을 산다고 한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좇아 살거나 환상에 빠져서 산다.

삶을 기분풀이로 여기며 쾌락을 탐닉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이러한 삶은 결국 권태와 싫증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이때 불쑥 '불안'이 밀려온다.

이 불안 앞에서 인간은 절망을 선택할 수도 있고, 희망을 선택할 수도 있다.

절망은 좌절과 타락으로 이끌고,

희망은 도약하게 만든다.

이렇게 해서 절망의 유혹을 극복하고

희망을 붙들면,

윤리적 삶으로 도약하게 된다.


불안으로 인해서 이제 두 번째 단계인 윤리적인 삶이 시작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보편적 가치와 윤리에 따라 생활하게 된다.

사람은 이제 내면의 양심에 호응하고 의무에 성실하려고 애쓴다.

이제 비로소 인간은 '되어야 할 것'이 된다.

그러나 이 단계도 결국 벽에 부딪치고 만다.

높은 도덕에 이르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 그리고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무력함을 절감한다.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이 뜻대로 잘 안 되고,

또 윤리적으로 산다고 세상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엉터리로 사는 사람들이 망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고뇌하는 인간은 마침내 죄의식과 불안에 빠진다.


그러면 또 절망 아니면 희망을 선택해야 한다.

절망을 택하면 다시 타락하여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반면, 희망을 선택하면 현실적 한계와 부조리의 해결사로서 신을 찾는 삶으로 도약하게 된다.

결국, 종교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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