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이라이프 Apr 24. 2020

힘들지만 나다움을 사랑하세요.

나만 겪는 듯한 고단함, 지나고 보면 귀한 아름다움인 것을...

 시골, 힘들었지만 아름다웠다.


    대학 졸업 후 50대 중반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 시골 과수원에서였다.

어느 날 강의를 다녀오니 남편은 어머님과 상의 후 농사를 짓게 되었다고 했다.

 농사일이 그리 힘든 것인지도 모른 채, 힘든 일은 안 해도 되고

시간 강사 일은 계속할 수 있다는 약속만 믿고 과수원에서 세 살짜리 아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농사일을 하느라 지금처럼 육아, 교육 이런 것에는 신경 쓸 새도 없이 생존을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다.

어쩌면 가장 기본적으로 아이에게 해줘야 할 것도 제대로 해 주지 못하며 키웠다.

그 흔한 학습지 하나 없어서 사교육은 시켜 보지도 못했고 이름도 못 쓰고 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우리아들이

학교에서 유일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시 프로그래머 일을 했었던 남편은 늘 방치된 아이가 걱정되었는지 집에서 프로그램으로 연산 연습을 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학교에 입학하고 하교를 시켜야 하는데도 일하시는 분들 식사와 새참 준비로 바빠

아이를 제 때 데리러 가지 못하고 잃어버려 발을 동동 구른 적도 있었다.

집안일이 우선이라 아들은 학교가 파하고 나서 바로 옆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내가 데리러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글자도 못 읽는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는 일이 버거울 때, 자녀교육은 일종의 사치처럼 느껴졌던 시기이다.

    너무도 몰라서, 빚이 무서워서 아이한테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보냈던

 그 시절들에 대한 미안함을 갖고 있다. 자식이라면 모든 걸 내어 주던 엄마의 사랑 앞에 부끄러울 정도로

너무 아이들에게 해 준 게 없었던 나의 직무유기를 그저 버거운 삶만으로 합리화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기새의 작은 둥지를 보며 흥분하고 흐드러지게 핀 배꽃과 개나리 울타리 앞에서 웃음 짓던 작은 추억들이 많다.






아이들 데리고 동물원 한 번 안 가본 가정이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 가족이다. 과수원을 벗어나기 힘들었던 삶,

그 속에서 아이들이 컸다. 그러나, 아이들보다 더 힘들게 자랐을 남편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알기에

난 남편에 대한 연민을 갖고 있다. 많이 힘들었지만, 사진 속에서 우리는 항상 웃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름다웠다.

시골에서의 생활은 또 다른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게 했고, 가장 힘들 때였지만 더 힘들게 사는 분들을 보며

감사를 느꼈던 때이기도 하다.




아들과 7살 터울의 딸은 당시 '즈믄둥이'라고 불리며 태어난 2000년생이다. 뉴밀레니엄 베이비라고 다들 출산 붐이었던 시기에 낳았던 딸이다. 딸아이를 낳고는 과수원도 좀 안정을 찾아갔고, 늦둥이의 재롱에 고단함도 잊고 살았다. 씩씩하고 활달한 딸아이는 동네 전교생이 60명인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신입생이 모두 열명이라 교장선생님이 풍선과 필통 등 입학 선물까지 챙겨주셨다. 우리 동네 이장님 손자도 그 학교에 같은 반이었고 동네 애들이 몇 명이 있어서 매일매일 얼마나 재밌게 뛰어놀았는지 모른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건, 가훈 전시회를 하던 날, 술 좋아하시던 이장님 댁 손자가 '처음처럼'이라고 써진 가훈을 들고 와서 전시해 놓은 것을 보고 속으로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운동회 때도 온 동네 분들이 게임도 하고 모여서 막걸리 드시면서 구령대에 올라가셔서 노래자랑 하시던 뒤풀이의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정말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축복이었던가. 자녀의 성공만을 위해 경쟁에 골몰하는 삶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면에서는 많은 고통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감사한 일이다.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왜 나만, 왜 내가'라는 불만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조금 먼 거리에서 다시 그 일을 바라보면 내 인생의 그림 속에 꼭 필요한 부분이고 그 부분이 있어서 내 인생이란 작품이 더 아름답고 다채로워 보일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구나에게 있는 그 광야 시절이 없었다면 어디서 겸손과 포용력에 대해 더 잘 배울 수 있었을까?


작가의 이전글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