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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lf Dec 21. 2020

삽질

무의미함의 가치

삽-질

1. 삽으로 땅을 파거나 흙을 떠내는 일.

2. 별 성과가 없이 삽으로 땅만 힘들게 팠다는 데서 나온 말로, 헛된 일을 하는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혹시 내가 군인이기에 '삽질'을 다루는 글을 쓴다고 생각한다면, 오해는 멈춰주길 바란다. 일단 나는 보직 특성상, 삽질을 많이 하지 않으며(거의 안 한다. 군대에 들어온 지 8개월이 넘어가지만, 삽질은 총 2~3번 했다.) 두 번째로, '삽질의 가치'를 깨달은 것은 고등학생 때이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도 올라와있듯이, '삽질'은 보통 헛된 일을 하느라 시간을 날려 보낸 상황을 설명할 때 많이 사용한다. 남이 나에게 '삽질'을 시키는 경우도 많지만, 누가 시키지 않아도 헛된 일에 시간을 쓰는 경우도 역시 많다. 오늘 다루고 싶은 삽질은 후자이다. 예시를 통해 다루고 싶은 삽질을 설명하겠다. 나 같은 경우, 아무래도 공부할 때 가장 삽질을 많이 한다. 계산 실수나 문장 하나를 잘못 읽어서 2~3시간 고민하다 끝내 친구/선생님에게 물어봤는데 알고 보니 내가 문제를 잘못 읽었을 때. 또는, 특정 주제나 수식에 꽂혀서 시간을 들여 파고들었더니만 알고 보니 별 것 없거나 또는 원래 알고 있던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서술한 것에 불과할 때. 착각/오해/실수 등으로 시간을 날렸지만 얻어간 것이 없을 때 또는 너무 얻어간 것이 적을 때, '아 오늘도 삽질했네'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대학 와서 실험 전공 수업을 들을 때도 그랬다. 3~4주 동안 실험 1개와 그에 대한 리포트 2개를 영어로 작성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시간을 선사한) 전공수업이었는데, 실험 매뉴얼이 정확하지 않았어서 그런지 아니 실험과목인데 도대체 왜? 실험 대상과 방법을 깨닫는 것은 2~3주를 1주일에 10시간 이상 실험하면서 삽질한 뒤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별 시답지 않은,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았던 주제에 꽂혀 시간을 쓰고, 누가 옆에서 알려주기만 하면 되는 실험 도구들의 사용방법을 혼자(우리 조끼리) 터득하며 시간을 버려야만 그제서야 윤곽이 드러나는 실험 수업이었다. 아직도 생각하면 치가 떨릴 만큼 힘든 수업이었다.


그렇지만, 내 기준 안에서 삽질은 성공을 향한 지름길이다. '삽질이 헛된 일로 보이는 유의미한 일을 하는 행위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는 삽질의 정의를 깨는 것이다. 물론, 오지선다에서 틀린 선지 4개를 골라내면 맞는 선지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틀린 선지를 고르는 것도 마냥 무의미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더 집중하고 싶고, 더 하고 싶은 말은 설사 결과물이 무의미할지라도, 과정 속에서 얻어가는 것이 많다는 뻔한 말이다. 그저 시행착오가 필요했었다는 뻔한 말이라는 뜻이다.


뻔한 말을 뻔하지 않게 하는 것은 참 힘든 일인걸 알기에 조금 긴장되지만 마저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삽질을 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까? 우리가 project/목표/개념 이해에 있어서 삽질을 해버렸다면, 우리는 어째서 그렇게 무의미한 일을 했던 것일까?


나의 대답은, (뭐가 됐든) 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택의 기저에 깔려있는 상황 이해에 있어서의 착각이었든, 또는 미처 고려하지 못한 변수/상황의 출현이었든, 또는 선택을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서의 결함이었든, 또는 선택이 가져다주는 결과를 향한 오해였든, 분명 어떤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결과, 즉 제자리로 돌아와 버린 것이다. 그리고 선택의 주체는 이 상황에 대해서 매우 못마땅해하며, 허망해한다.  이 문단의 논의는 선택의 주체(=나)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주체가 내린 선택지보다 나은 선택지가 존재했다."라는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말을 하고 싶다. 그렇기에 자신의 행동이 가져다주는 효용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삽질했다고 자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더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면 수학에서 쓸 것 같은 밑줄 표현 속 '더 나은 선택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뜻 역시 아니다. 주체는 분명 나름대로의 최선의 수를 뒀지만, 고려하지 못한 변수로 인해 '더 나은 선택지'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또) 그렇지만, 알고 보니 '더 나은 선택지'를 고를 수 있었다는 의심이 회의감을 강화시키는 상황 역시 자주 볼 수 있다.


선택의 기저가 되었던 개념/명제/문장/이해/논리가 선택 당시 고려하지 못한 변수를 이미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는 글자로 쓰인 개념/논리가 이해를 위해 '번역'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일부 의미를 손실하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분명 사고와 언어는 서로가 서로를 구축하고 구성하며 상호작용하지만, 사고=언어인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번역의 과정이 필요하고, 이 과정에서 변형이 일어난다. 이미 변형이 완료된 '글자 문장'들은 아무리 많이 보고 스스로 되짚어보아도, 별 자극 없이는 유실된 의미/정보를 찾을 수 없다(어려운 일이다). 다시 삽질로 돌아가서, 삽질을 하고 나니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자신이 알고 있던 '개념'에 포함되어있었다면? 그럼 사람들은, 선택 당시의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것을 고려하지 못했다 의심하며, 스스로를 자책한다. 하지만, 사후에야 보이는 것들은 사실 이미 알고 있던 것이 아니다. 아마도, 번역 과정에서 유실된 개념이었기에, 선택 당시 고려되지 못했던 것이고, 사후에 보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이미 알고 있던 것으로 오해를 받는 것이다. 즉, 삽질은 변형되고 잃어버린 개념/논리들을 사례를 통해 주워가는 과정이란 것이다. 이해 당시에, 번역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정보의 변형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삽질을 하지 않고 나아갈 방법은 없다."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여기서 끝낸다면, 시행착오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길게 적어놓은 것이겠지만,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점이 있다. 삽질을 하다 보면, 삽에 익숙해지고, 땅을 파내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는 것처럼, 시행착오를 계속 겪다 보면, 행동에 익숙해지고, 그렇기 때문에 행동의 cost가  줄어드는 효과가 나타난다.

이과여서 그렇겠지만, 나는 이를 치환 적분과 부분 적분에서 처음 느꼈다. 무엇을 치환할지, 무엇 먼저 적분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계산에 익숙하지 않으면 감히 손이 안 간다. 한번 계산을 할 때마다 시간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먹기 때문에, 잘못 손대기가 무서워 아무것도 못한다. 아무것도 못하니깐 당연히 문제를 풀 수도 없는 것은 덤이다. 그런데, 몇 번 문제 삽질하니깐(치환/적분했던 거 다시 반대로 치환/미분해서 제자리로 돌아오고) 익숙해졌다. 그러다 보니 계산 실력이 올라가고, 치환/부분 적분은 별 것 아닌 일이 되었고, 그렇게 난 모르는 문제가 나왔을 때, '시도 해법 할만한 방법'에 2가지를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이들의 cost가 줄어들지 않았다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서 얻게 되는 자신감은 보너스다.


세련됨이 자신만의 투박함을 갈고닦은 것이라는 말처럼, 결국 멋있고, 유의미함은 무의미한 삽질에서야 싹을 틔울 수 있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시 돌아온지언정 걸어 나가야만 하고, 틀린 길을 가지 않기 위해서 걷지 않는 것은 저번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답지를 백지로 내는 것과 같다. 지금도 삽질을 하는 당신에게, 그 삽 밑에 당신이 찾는 보물상자가 없긴 할 건데, 확신을 갖고 삽질하기 바란다.



이번 글이 더 어렵네. 난 항상 이게 문제야. 너무 일반화하려다가 글이 길어지는 것 말이야. 심지어 메시지는 뻔하고. 힘을 빼고 적어야는데 잘 안되네. 그래도 매듭지었으니 됐다.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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