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회계랑 재무관리만 파던, 숫자에 빠져 살던 놈이었다.
손익계산서를 들여다보며 제품 성패를 따지고,
현금 흐름표에선 정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 내가 색조 브랜드의 CFO 자리에 앉았다.
처음엔 솔직히 좀 우습게 봤다.
립스틱이야 제조원가 낮추고, 유통 마진만 잘 설계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이 판은 숫자보다 감정이 먼저 흐르는 세계였다.
어느 날, 마케팅 팀장이 회의 중 나에게 말했다.
“요즘은 매트한 텍스처가 유행이에요. 광택 있는 건 반응이 별로 안 좋아요.”
속으로 '질감이 팔아주진 않지 않나?' 싶었다.
매트든 글로시든 결국 중요한 건 가격과 마진이니까.
하지만 출시 후 실적 데이터를 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같은 컬러 톤인데도,
텍스처가 '광택'이냐 '매트'냐에 따라 판매량이 정확히 두 배 이상 차이 났다.
제품의 성패를 가른 건 소비자의 감정선이었고,
나는 그 흐름을 읽지 못했던 거다.
그때부터 숫자보다 먼저
‘소비자가 이걸 왜 사고 싶어 할까’를 생각하게 됐다.
회의에서 단가 말고 “느낌”이나 “톤” 얘기 나올 땐
내가 할 말이 없었는데,
지금은 먼저 “이거 요즘 감정선에 맞는가?”부터 묻는다.
이젠 재무제표를 넘기기 전에
인스타그램 피드를 먼저 보고,
유튜브에서 리뷰 댓글을 먼저 읽는다.
소비자의 감정이 숫자보다 먼저 움직인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나는 숫자로 말한다.
캐시플로우, ROI, 유통 마진, 프로모션 손익 구조…
그건 여전히 내 영역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숫자는 늦게 온다.
감정이 먼저 흐르고, 브랜드는 그걸 숫자로 바꾸는 일이다.
요즘 후배들에게 이런 얘길 자주 한다.
“제품이 잘 팔려도 망할 수 있다.
감정은 빠르지만, 재고는 느리게 움직이거든.”
그게 CFO가 감정을 무시하면 안 되는 이유다.
예쁘다고 팔리는 게 아니라,
팔릴 것처럼 느껴지게 해야 예쁘다.
[다음 편 예고]
“감정은 빠르고 재고는 느리다 – 잘 팔려도 망하는 구조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