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면 여섯살처럼..
유치원을 다녀온 딸이 말한다. “아 맞다, 내가 말했나? 엄마 나 결혼하기로 했어”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결혼한다고? 누구랑? 근데 결혼이 뭔지 알아? 얘가 벌써 이성에 눈을 뜨는 건가. 수많은 청첩장을 받아왔지만 딸에게 이렇게 갑자기 결혼 발표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얼마 전까지 아빠 혹은 엄마 심지어 여동생이랑 결혼하겠다던 내 아가의 입에서 낯선 남자아이의 이름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마치 딸아이를 누가 빼앗아가기라도 하는 양 극성 엄마가 된 나는 그날 이후로 그 아이의 정체를 캐묻기 시작했다.
끈질긴 추궁 끝에 딸아이가 밝힌 결혼 발표의 전말은 이러했다. 시작은 혼돈의 유치원 적응기간.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아이에게 두 명의 남자 친구가 접근했다. A는 딸의 관심을 받기 위해 머리를 잡아당기고 어깨를 툭툭 치며 장난을 걸었다. 친해지고 싶은 맘이었겠다만 딸의 울음은 더욱 폭발했다. 반면 B는 구석에 앉아있는 딸에게 다가가 장난감을 건네며 “울지 마 내가 있잖아”라고 했다.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고.) 여심을 울리는 따뜻한 한방. 이런 스윗함은 타고나는 것인 게 분명하다.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로맨스의 정석이다
어쨌든 이날 이후 딸의 B군 앓이가 시작됐다. 뜬금없이 “엄마 B군은 머리를 이렇게 묶는다? 귀엽지?” 하질 않나, B군을 우리 집에 초대하자며 설레 한다. 귀여운 첫사랑에 웃음이 나왔다. 엄마한텐 어쩌다 한번 인심 쓰듯 써주는 편지인데 B군한테는 매일 쓴다. 그림도 그려서. 하 벌써 러브레터라니. 질투도 아닌 배신감도 아닌 알 수 없는 기분에 괜히 마음이 일렁거린다.
사정상 집 근처 유치원으로 급하게 옮기면서 딸아이의 로맨스는 생각보다 짧게 끝이 났다. 유치원 등원 마지막 날, B군에게 작별인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딸아이는 고심 끝에 평소 아끼던 꽃반지 하나를 가방에 넣었다. 반지를 건네는 딸아이의 표정은 어땠을까. 둘은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이별을 한 지 2달이 된 지금, 아이는 가끔 B군에 대한 말을 꺼내곤 하지만 그보다 더 티니핑(요즘 핫한 캐릭터)과 사랑에 빠진 상태다. 요즘은 또 아빠랑 결혼하겠다고 해서 아빠는 한껏 만족해하고 있다.
B군과의 생애 첫 러브스토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희미해질 짧은 에피소드에 불과했지만 생후 58개월밖에 안 된 아이도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더불어 강산이 변해도 몇 번 변했을 요즘 시대에도 여자 친구들의 머리를 잡아당기고 괴롭히면서 ‘좋아서 장난친 것’이라는 장난꾸러기들의 서툰 사랑표현도 여전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딸아이를 잡고 A군처럼 ‘좋아서 괴롭히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좋으면 B군처럼 표현하는 게 맞는 거라고 괜히 일러둔다. 그러자 아이는 “괴롭히면 친구가 싫어하겠지, 싫어하는걸 계속하는 사람은 없어”라고 한다. 어른들의 생각보다 아이들의 생각과 감정은 넓고 깊다. 어쩌면 어은들보다 나은지도 모르지.
딸 가진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인가. 괜히 뉴스에 나오는 ‘사랑해서 괴롭힌 것’이라고 말하는 데이트 폭력이며 스토킹이며 그런 문제를 걱정하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럴 때면 아이가 더 이상 크지 않고 오래오래 내 품 안에서만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의 귀엽고 순수한 마음이 오래 지켜지기를, 영원히 행복한 사랑만 했으면 마음속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