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무엇을 만드는가 #3
내가 게임 회사에 다닌다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게임을 만들면서 먹고살 수 있겠느냐 하는 눈치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게임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이자 산업이 되었다. 지금은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게임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고 게임을 중계하는 사람들이 있다. 프로게이머들은 운동선수처럼 국가대표로 뽑혀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따온다.
규모만 봐도 그렇다. 전 세계 게임 시장은 2022년 기준 약 2,082억 달러에 달한다. 팬데믹이 끝나면서 성장세가 한풀 꺾였다고는 하지만, 게임은 이제 취미를 넘어 사람들을 연결하고 감정을 나누게 하며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매개체로 자리 잡았다.
게임 시장의 확장은 플랫폼의 진화와도 맞물려 있다. PC와 콘솔 중심이던 시장은 이제 모바일, 클라우드, VR, AR 등으로 다변화되고 있다. 특히 모바일 게임은 접근성이 뛰어나고 개발 비용 대비 높은 수익성을 보장하며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분야다. 2022년 모바일 게임 시장 규모는 916억 달러로 전체 게임 시장의 4할 이상을 차지했다. 그 뒤를 이어 콘솔(591억 달러), PC(363억 달러) 순으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또한 이제 게임은 e스포츠, 스트리밍 등 다양한 산업과 결합하며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게임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것’에서 ‘게임을 중심으로 한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패러다임이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게임 강국이다. 2022년 한국 게임 시장의 매출은 약 22조 원으로 세계 게임 시장에서 7.8%의 비중을 차지한다. 규모로만 따지면 미국, 중국, 일본에 이어 세계 4위다.
더욱 주목할 만한 점은 게임이 한국의 콘텐츠 수출에서 차지하는 압도적인 비율이다. 2022년 기준 한국의 콘텐츠 수출액 중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67.8%로 K-드라마(7.2%)이나 K-POP(7.0%) 보다 월등히 높다. 한국의 방송 산업과 음악 산업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한국 콘텐츠 수출의 주력 분야는 단연 게임이 산업이다.
플랫폼별로 보면 모바일 게임이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2022년 기준 모바일 게임 매출은 약 13조 원으로 PC 게임(5조 8천억 원)과 콘솔 게임(1조 1천억 원)을 크게 앞선다. 모바일 게임은 접근성이 뛰어나고 대중적이며 MMORPG, 전략 게임, 수집형 RPG 등 여러 장르로 확장되면서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반면 한때 한국 게임 시장의 중심이었던 PC 게임은 여전히 강력한 팬층을 보유하고 있지만, 모바일과의 경계를 허물며 크로스플랫폼 형태로 변화하는 중이다.
콘솔 게임 시장도 주목할 만하다. 그동안 한국 게임 업계에서 콘솔 게임은 다소 소외된 분야였지만, 최근 정부의 육성 정책과 기업들의 도전이 맞물리면서 성장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네오위즈의 P의 거짓(Lies of P, 2023)이 대표적인 사례다. 2023년 출시된 이 게임은 글로벌 판매량 100만 장을 돌파하며 한국 게임의 서구권 성공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의 게임 기업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넥슨은 한국 게임 시장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로 바람의 나라(The Kingdom of the Winds, 1996), 메이플스토리(MapleStory, 2003), 던전앤파이터(DUNGEON & FIGHTER, 2005) 등으로 한국 온라인 게임의 역사를 써왔다. 특히 바람의 나라는 세계 최초의 그래픽 MMORPG로 한국형 MMORPG의 기틀을 다졌다. 메이플스토리는 2D 횡스크롤 방식의 MMORPG로 귀여운 그래픽과 풍성한 콘텐츠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나아가 최근에는 해양 탐험, 식당 운영이라는 개성 강한 소재를 맛있게 버무린 데이브 더 다이버(DAVE THE DIVER, 2022)와 같은 독특한 게임을 출시하며 새로운 시장 개척과 혁신을 이어가고 있다.
엔씨소프트는 리니지 시리즈를 통해 정립한 MMORPG 성공 공식을 바탕으로 막대한 매출을 올렸지만, 과도한 경제적 부담을 주는 수익 모델과 부족한 서비스 정신 등의 문제로 큰 질타를 받았다. 한때 22조 원을 돌파했던 시가총액은 현재 5분의 1 수준으로 추락했으며 최근에는 비용 절감을 위한 구조조정과 함께 새로운 장르의 게임을 선보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넷마블은 모바일 게임 시대를 선도한 기업으로 세븐나이츠(Seven Knights, 2014) 등 다양한 히트작을 보유하고 있다. 넷마블의 특징 중 하나는 국내 게임사들 중 지적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 Rights, 이하 'IP') 사업화에 가장 적극적이라는 점이다. 게임은 물론 만화, 드라마, 웹툰, 웹소설 등 다양한 부문에서 경쟁력 있는 IP를 발굴하고 팬들의 기대에 걸맞게 게임으로 구현하여 선보이는 식이다. 예를 들어 넷마블이 게임화한 리니지 2 레볼루션(Lineage 2: Revolution, 2016)은 엔씨소프트, 제2의 나라(Ni no Kuni: Cross Worlds, 2021)는 레벨파이브, 나 혼자만 레벨업: 어라이즈(SOLO LEVELING: ARISE, 2024)는 디앤씨미디어가 IP를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탄탄한 원작을 기반으로 퀄리티가 보장되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데다 마케팅으로 대중의 이목을 끌기 쉽고 원작 팬덤을 게임에 흡수할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다. 다만, IP홀더의 까다로운 주문을 맞춰줘야 하는 데다 지급수수료를 내야 하기 때문에 수익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 자체 IP의 성공이 절실한 상황이다.
한때 이 세 기업을 묶어 한국 게임 업계를 이끄는 '3N'이라고 표현했으나, 최근에는 크래프톤, 스마일게이트, 펄어비스, 시프트업 등 새로운 강자들이 빠르게 성장하며 시장의 판도가 바뀌고 있다.
PUBG: 배틀그라운드(PUBG: BATTLEGROUNDS, 2017)의 성공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크래프톤은 배틀그라운드 모바일(PUBG MOBILE, 2018)을 성황리에 출시 및 서비스하고 있으며 인도에서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또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비주얼의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 인조이(inZOI, 2025 얼리액세스 예정), 특허권 소송으로 골머리 앓고 있으나 흥행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팰월드(Palworld, 2024)의 모바일 버전, 이영도 작가의 판타지 대하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를 기반으로 한 액션 어드벤처 게임 등 다채로운 신작을 준비하고 있어 앞으로가 더욱 기대된다.
스마일게이트는 크로스파이어(CrossFire, 2007)로 중국, 동남아 시장에서 초대박을 거두며 글로벌 FPS 시장에 우뚝 섰다. 크로스파이어를 소재로 한 드라마 천월화선(穿越火线, 2020)을 제작하는 등 IP 확장에 공을 쏟는 동시에 PC MMORPG 로스트아크(LOST ARK, 2018), 모바일 수집형 RPG 에픽세븐(Epic Seven, 2018) 등 완성도 높은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검은사막(Black Desert, 2024)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은 펄어비스는 아름다운 비주얼, 사실적이고 스타일리시한 액션,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기술력에 강점을 지니고 있다. 뛰어난 품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신작들의 출시가 거듭 연기되고 있긴 하나, 차기작인 붉은사막(Crimson Desert, 2025 출시 예정)과 도깨비(DokeV, 출시 시기 미정)는 여전히 많은 게이머의 관심 대상이다.
비교적 신생 기업인 시프트업은 감각적이고 매력 넘치는 아트와 독창적인 게임성으로 데스티니 차일드(Destiny Child, 2016), 승리의 여신: 니케(GODDESS OF VICTORY:NIKKE, 2022) 연타석 홈런에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AAA 콘솔 게임 시장을 겨냥한 스텔라 블레이드(Stellar Blade, 2024)로 전 세계 게이머에게 화려하면서도 시원시원한 액션을 선보이는 등 한국 게임 개발사의 새로운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한국 게임사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한 과제는 국내 시장의 한계를 넘어 해외 시장을 적극 공략해야 한다는 점이다.
게임 시장은 이제 국경을 넘는 것이 당연한 시대다. 국내에서만 통하는 게임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해외 시장을 공략하는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생존과 성장을 위한 필수 전략이다.
먼저 자국 시장은 언제든 포화 상태에 이를 수 있다. 글로벌 무대로 나아가야 더 많은 게이머를 확보하고 매출도 극대화할 수 있다. 특정 국가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 규제 변화나 경제 불안정이 닥치면 대안이 없다. 반면 여러 시장에서 서비스를 운영하면 한 곳이 부진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균형을 맞출 수 있다.
게임 산업은 이미 글로벌하게 움직이고 있다. 해외 트렌드를 빠르게 반영하지 못하면 경쟁력이 약해진다. 특히 동남아, 중동, 남미 같은 신흥 시장은 모바일 게임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클라우드 게이밍, 콘솔 등 새로운 플랫폼을 개척하면 더 큰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IP 확장 역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해외에서 성공한 게임은 단순한 게임을 넘어 하나의 브랜드가 된다. 영화, 굿즈, e스포츠 등 다양한 방식으로 추가 수익을 창출할 기회가 열린다. 해외 퍼블리셔와 협업하거나 글로벌 투자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도 가능해진다.
더 이상 특정 국가에만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 세계를 무대로 삼아야 더 큰 가능성을 만들 수 있다.
한국 게임 업계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 중 하나는 중국 게임 시장의 급부상이다.
중국은 2017년 이후 한국 게임의 판호(중국 내 서비스 허가)를 사실상 중단했다가 최근 일부 게임에 한해 다시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역으로 중국 게임사들은 원신(Genshin Impact, 2020), 명조: 워더링 웨이브(Wuthering Waves, 2024), 검은 신화: 오공(Black Myth: Wukong, 2024) 같은 수작을 만들고 한국 게임 시장을 적극 공략하며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게임 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존 MMORPG 중심의 시장 전략을 넘어 다양한 장르와 혁신적인 게임성을 확보해야 한다. 과거의 성공 공식을 답습하는 것만으로는 글로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편 이 거대하고 변화무쌍한 소용돌이 속에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 게임 산업이 아무리 흥해도 내 지갑 두께와는 큰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