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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제 Oct 14. 2024

아기 심장소리를 처음 듣던 날

생명을 책임질 준비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아.
여름엔 수박도 달고, 봄에는 참외도 있고, 목마를 땐 물도 달잖아.
그런 거, 다 맛보게 해주고 싶지 않아?
빗소리도 듣게 하고, 눈 오는 것도 보게 해주고 싶지 않아?
- 한강 <침묵> 中


최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자신의 자전적 소설에서 남편과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아이를 낳는 일에 대해 망설였던 한강 작가에게 남편은 "세상은 아직 살아갈 만도 하지 않냐"라고 이야기한다. 한강 작가는 웃으면서, "세상이 아름다운 순간들이 분명히 있고 현재로선 살아갈 만하다."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여름 수박이 단 건 사실이라면서.


내게 출산이란 다디단 여름 수박을 먹이고 싶은 존재를 세상에 낸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그 생각에 이를 때까지, 그때까지의 터널을 어떻게 빠져나올지,
 과연 빠져나올 수 있을지.
내가 대신 살아줄 수 있는 몫도 결코 아닌데.
어떻게 그것들을 다시 겪게 하냐.


본디 내 생각은 수박 이야기를 나누기 전 한강 작가가 지녔던 사고방식과 동일했다. 한강 작가는 때때로 잔혹한 현실의 일들을 볼 때면 고민 없이 아이를 낳는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느껴졌다고 했는데, 나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이 힘든 세상에 또 하나의 생명초대한다는 것이 옳은 일일까. 또한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터널을 건너왔는데. 전혜린 작가의 제목 그대로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어쩌면 또 하나의 존재를 탄생시킨다는 내 욕심이 아닐까.


오래도록 나에게 임신 출산은 현실적인 문제 이전에 철학의 문제이자 실존적 문제였다. 내 안에서 이러한 물음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이를 낳아야겠다'는 결심이 서는 데 오래 걸린 것이기도 하다. <부모가 된다는 것>(스베냐 플라스필러, 플로리안 베르너 공저)이라는 책에서도 부모가 된다는 것을 철학적 모험으로 정의했다.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시작되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정해진 답은 없다. 앞으로의 여정에서도 계속해서 찾아나가야 할 문제이다. 어쨌든 우리 부부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고, 세상을 살만하게 해주는 것들을 찾아나가려고 한다. 제철 과일과 눈 오는 날의 풍경, 볼을 스치는 바람처럼. 살다 보면 아름다운 순간도 많다는 것을 아이에게도 알려주고 싶다.



임신 5주 차에 병원에 방문했을 때 쿵쿵 쿵쿵, 작지만 규칙적인 심장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안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니.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은 태아가 들려주는 심장소리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아직 부모라는 말도 어색한 우리에게, 곧 다가올 존재가 알려주는 강력하고 격동적인 신호.


처음 해보는 임신, 처음 뛰는 심장, 처음 느껴보는 감정. 모두 다 새롭게 경험해 보는 일이다. 내심 기대했던 부분이었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새로운 경험을 안겨줄까. 거기서 나는 무엇을 느끼고 배울까. 나의 경험을 위해 아이를 갖는다는 사실이 윤리적인 걸까, 이러한 표현을 하는 게 적절한 걸까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다.


아가야, 너는 어떤 세상을 품에 안게 될까. 태어나서 무엇을 보고 들을까. 우리에게 어떤 웃음을 가져다줄까.


한 생명을 키운다는 것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여서 더욱 소중하고 애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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