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 때 가장 많이 하는 것이 자책이다. 우울증을 낫는 방법이나 지침서에는 그것이 병이 된 것이므로 하지 말라고 분명히 나온다. 모두들 그렇게 권한다. 그런데 다들 알 것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좋지만 그것을 습관으로 만드는 것은 힘들다. 그것처럼 자책을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다. 남에 대한 배려가 심하거나 내가 받을 상처가 두려워 방어기제처럼 작용하는 것이다.
내가 제일 많이 한 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자책이었다.
‘내가 이 집에 있어서 이렇게 집 분위기가 어두운 거구나.’
‘아픈 사람이 있으면 식구들이 힘들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무기력하게 있는 걸까? 그래서 우리 식구들이 힘들지는 않을까?’
이렇게 걱정을 하다가 자책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남편이 일을 하는 데 내가 아픈 것 때문에 걱정하느라 거슬릴 것 같았다. 게다가 남들은 둘, 셋이나 되는 아이를 키우는데 나는 그것도 못하고.
이러한 자책 거리가 끊임이 없다. 중독 혹은 습관에 가까운 자책이었다. 사람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도 누구나 그렇게 부족하게 살아가는 것도 알지만 나는 유독 나에게 가혹했다. 당연히 공부만 하다가 요리를 뚝딱거리며 할 수 없다. 정리를 한 평생 한 것이 아닌데 해보지도 않고 집 정리를 잘할 수도 없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그렇다. 아이를 한 번 키워본 것도 아닌데 딱딱 아이에게 맞춰서 할 수가 없다. 그건 당연한 건데 나는 그런 걸로 나를 궁지로 몰아세웠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존재는 점점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고 존재 가치가 낮아진다. 이 악순환의 끝은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작은 일이라도 성취감을 느끼려고 하는데 어떤 일에서도 만족할 수 없다면 그 일을 미루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 자책을 하며 무기력하게 자리에 누워 있으면 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싫어진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고, 아무것도 못하는 내가 왜 태어났는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악순환의 고리를 완성한다. 나는 그것을 가장 완벽하게 해냈다. 다른 것은 하지 못하면서 악순환시키는 생각의 고리를 완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지만, 나는 그것을 완벽하게 해서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입을 옷이 없어.”
남편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빨래도 제 때 못해 놓는 사람이었다. 집에서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점은 남편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근데 잘하지도 못하는 일을 하려니 에너지가 너무 들어가고 그 에너지는 복구가 되지 않아서 결국 안 하고 놓아둔 채가 된 것이다. 이럴 때의 나는 주위에서도 이해를 못하지만 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할 수가 없었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었다. 만약에 누가 와서 빨래를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해도 “그럼 죽이세요.”라고 할 만큼 의욕이 없었다. 이러한 굴레를 깰 방법은 자신에게 밖에 없었다. 아무리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들리지 않는다. 잔소리해봐야 아무것도 모르는 남의 잔소리일 뿐이었다.
“때 되면 알아서 해.”
아이를 키울 때 많이 듣는 소리 중에 하나였는데, 이런 무기력한 상태의 나는 정말 때가 되어서 나를 깨고 나오면 알아서 일을 했다. 그러다가 다시 무기력해지기를 반복하기는 했지만. 그런데 여기에 잔소리를 얹으면 나는 나를 깨고 나오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혼자 이 것을 깨는 힘이 약할 때가 있다. 그러면 전문가의 상담을 받고 약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내가 가장 심하게 느끼는 자책은 관계의 틀어짐에 있었다. 우울하다 보니 사람들도 나와 있는 것을 싫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뭔가 실수해서, 내가 우울해서, 내가 비관적으로 말해서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거나 기분이 나빠지거나 할까 봐 신경 쓰이기 시작하면 인간관계가 협소해진다. 사람들을 피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자책의 하나였다. 자책이란 것은 정말 끝도 없다. 나를 미워하고 합리화하지 못하면 더더욱 그랬다. 더욱 심해지지 나아지지 않는 자책. 작은 자책은 눈덩이가 되고 또 나를 억눌렀다.
거기서 어떻게 나왔는지는 말할 수 없다. 아직도 나오지 못한 탓도 있고 각자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 방법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언제나 회피를 잘하는 나는 책으로 도피함으로 자책을 조금 덜었다. 아니 자책의 긴 시간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그러면 조금 안정을 찾으면서 자책의 강도도 낮아졌다. 어떤 사람은 나가서 걸으라고 한다. 그것도 좋은 방법일 수는 있겠으나, 나에게 밖으로 나가는 일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나가려면 일단 씻고 단정하게 옷을 입고 나가는 것이 기본인데 잠옷을 입고 씻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가려고 차림을 하기 까지가 너무 힘겨웠다. 반면에 책은 내가 구질구질하게 하고 있더라도 바로 도피가 가능한 구역에 있었다. 손만 뻗으면 있는 다른 세계. 나는 그래서 책이 좋았다. 종일 책을 읽으면서 나를 좀 잊어가고, 나에 대한 미움도 잊어갔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기 힘든 사람에게 책을 추천한다. 아니, 누구에게나 추천한다. 사람들이 이 행복하고 즐거운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늘어지던 시기에 가장 위로가 되었던 책 중에 하나는 [어쨌든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라는 책이었다. 도대체, 라는 작가님의 그림이 곁들여진 에세이였는데 거기에는 조금 자조적인 개그들이 나와서 나를 위로했다. 혹시 자조적인 책을 좋아하시는 분에게 추천한다. 가볍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씁쓸한데 위안이 된다.
생각이라는 것이 하면 할수록 깊어지기 때문에 우물을 깊이 파는 작업과 같다. 생각만 하고 무기력하게 있으면 그 우물에 가족뿐 아니라 주변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된다. 모든 상황에 함정이 깔려있다. 같이 앞으로 나아가도 모자랄 판국에 구렁텅이에 손잡고 들어가자고 끌어당기는 가족 구성원을 좋아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렇게 된다. 게다가 나중에는 그 구렁텅이에 다 끌고 들어온 것까지 자책을 한다. 이건 정말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상태이다. 이렇게까지 되지 않지 위해서 자기반성을 하는 것 까지는 좋으나 길게 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가장 우울해지는 지름길이다.
나만큼 나를 잘 알고 나를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