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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점심은 없다. 인생은 수업료를 치르기 마련이다

[사장은 아무나 하나요?]

by 아메바 라이팅
해도 해도 너무 한 거 아냐?


무표정한 얼굴로, 아니 그보다 멍 때리듯 생각이 정지된 표정으로, 여고생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왼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더니 무심한 듯 오른쪽으로 고개를 다시 돌려 옆 사람과 뭐라는지 중얼거렸다. 그리곤 둘이 미소를 주고받으며 웃음소리까지 들리도록 소리 내었다. 그리고 여고생이 몸을 돌려 내게 다가왔다. 무표정에서 갑자기 푸른빛의 눈망울이 번쩍하고 섬광을 발산했다.


여고생은 연신 허리 숙여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네 번이나 허리를 숙였다. 여고생에게 붙잡힌 내 손에 그 아귀 속을 빠져나오도록 전달해 줄 힘이 내게 없었다. 완전히 탈진되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제발 여고생이 내 손을 놓아주기를 바랐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손 좀 놓아주면 안 되겠니, 너무 힘들다.



좀 전까지 여고생과 함께 미소 짓던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나를 바닥에 앉히고 두 팔을 끌어당기더니 먼지 털듯이 탈탈, 하고 털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숨 쉬는 게 훨씬 편해진다. 그래서 그 남자가 내게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겠다 여기고 몸을 그에게 맡겼다.


그냥 2라운드만 하시자니까, 3라운드는 버겁다고 했잖아요.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여고생은, 아니 여자 아이는, 키가 155센티쯤 되고 몸무게는 많아야 60킬로 정도로 보였다. 어깨와 다리가 적당한 근력을 가졌다고 보였다. 땀범벅이지만 여드름도 많아 더욱 어려 보인다. 내일이면 쉰을 바라보는 늙은 이 몸을 여고생이 난타했다. 무참하게 얻어터졌다. 그것도 9분씩이나. 내게 심호흡을 계속 시키던 관장이 가볍게 흥분된 목소리로 계속해서 떠들었다.


고등학생이라도 대학 입시 준비하는 아마추어 선순데, 너무 우습게 보셨죠?


털리는 팔의 진동을 따라 같은 진동수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만만히 보다가 큰 코 다쳤다. 정말 코를 다쳤다. 3라운드 종이 울리기 몇 초 전에 코피가 터졌다. 종이 울릴 때 숨쉬기 힘들어 콧바람을 크게 불었더니, 피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쏟아졌다. 그리고 갈비뼈, 정확히 오른쪽 아래 갈비뼈, 두어 개가 아프다. 사실 그때는 그냥 숨쉬기가 어렵다고만 생각했지, 갈비뼈에 금이 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너무 힘들어서 숨쉬기가 힘들어 배가 아프다고 착각하는 줄 알았다.


그 날은 12온스의 백 글로브를 끼고 세 번째 스파링을 여고생과 한 때였다. 주먹에 힘이 실릴 정도로 상체를 이용하는 방법을 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설프게 복싱을 쉽게 얕잡아 봤다. 더구나 여고생이라고 너무 안이하게 만만해했다.



1라운드가 시작되고 얼마 가지 않아 여고생의 스텝과 몸놀림에 현혹됐다. 빠르고 번잡한 상대의 몸놀림을 따라가다 체력이 바닥났다. 사람은 다른 동물처럼 미러링 효과에 쉽게 빠진다. 그래서 거울을 보면서 새도우를 하다 보면 내 모습에 도취되어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속도나 파워보다는 폼에 빠지기 쉬운 게 미러링 효과 때문이다. 그런데 여고생과 스파링 하면서 이 지독한 미러링 효과에 적용되어 상대를 따라가다 바보가 됐다. 그때부터 일방적으로 맞기 바빴다. 스파링 전에 여고생에게 신신당부했다.


주고받는 새도우 연습 말고, 스파링 실전을 각자가 알아서 하자.



민간인인 나야 자기 과시였지만,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여고생에게는 찾기 힘든 실전 파트너였다. 1라운드 후 관장에게 또 호기를 부렸다. 절대 배려하지 말고 실전처럼 하라고 하세요, 라며 여고생에게 전달하라고 말했다. 2라운드에서는 관장이 그만두자고 했지만, 계속하겠다고 심각한 표정으로 답하자 관장이 여고생에게 건너가 귓속말을 중얼거렸다. 아마도 살살해 주라는 말인 것 같아 큰 소리로 만류했다.


체육관을 나와 관장과 함께 근처 정형외과에서 진료를 받았다. 갈비뼈 두 대가 실금이 났고 안면 통증은 일주일 이상 갈 거라고 했다. 그리고 햄스프링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여고생에게 맞은 부위나 맞지 않은 부위나 골병이 들었다.



두 달 후 다시 그 여고생과 스파링을 또 붙었다. 전혀 달라진 게 없다시피 했다. 그나마 맞는 법에 익숙해져서인지 갈비뼈가 나가거나 얼굴이 심하게 붓지 않았다.


그렇게 가드 가르쳐도 때리기만 급급하더니, 맞아보니 가드가 늘죠?


눈치 없이 관장이 얄밉게 말했다. 그래, 근데 이게 사실이다. 가드의 중요성은 복싱의 원투를 배우는 날부터 귀가 아프도록 듣는 잔소리다. 게다가 미트질을 하든 샌드백을 치든 주먹을 멋지게 뻗는 모습만 상상하고 날 보호하는 가드질은 자꾸 잊어 먹는다.


그런데 죽을 정도로 맞고 나니, 몸이 알아서 가드질을 한다. 그래서 얼굴도 붓지 않았고 갈비뼈도 온전했다. 다만 체력이 되지 않을 뿐. 정말 맞아봐야 자기 몸 귀한 줄을 아는구나, 불변의 본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미러링 효과도 없었다. 현혹되지 않고 무거운 몸을 세운 채 내 영역을 지켰다.


우리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다. 정말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난 뒤에서야 세상을 배운다. 사기당하고, 농락당하고, 좌절해 보니, 나를 그러한 외부 침략으로부터 보호하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외부 충격을 견디는 방법을 배우면 자연스레 그것을 참아 내는 맷집도 늘어난다. 정말 맞아봐야 정신이 드는구나, 복싱을 일찍 배울 것 그랬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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