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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Oct 31. 2019

패션에 눈 뜬 남자, 몸을 깎아 옷에 맞추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 나를 파괴한다

옷이 당신에게 어울리는지 고민하기 전에,
당신이 그 옷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먼저 고민하십시오.


별세한 유명 패션 디자이너의 말이다. 옷을 단순히 돈으로 구입하는 물품으로만 여기는 당신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이다. 옷이라고 해서 당신에게 함부로 안기고 싶은 게 아니다, 라고 말이지. 라거펠트의 이 말이 현실이다. 멋지고 탐나는 옷, 시계, 신발 등은 널렸지만 내게는 항상 어울리지 않았다. 조선사람이 왠지 연미복에 노란 가발을 쓴 느낌? 항상 하반신의 기장은 길이를 재어 백화점 수선 코너로 직행해야 하고, 재킷에 어울리지 않는 볼록한 배 때문에 사이즈가 넉넉하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셔츠를 골라야 했다. 구두는 마네킹에게 어울린다 싶어 골라 신으면, 어김없이 발가락이 고통스럽다고 아우성이다.


내 돈 주고도 욕먹는 느낌.
패션이 나를 테러한다는 경계심이 눈길 가는 것마다 주의령을 발호한다.



#1. 드디어 패션에 눈을 뜨다. 아주 크게.


어릴 때 거울을 잠시라도 보거나 빗질이라도 하려고 들면, 여지없이 듣기 싫은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왔다.


사내 자슥이, 무슨 거울보고 빗질이고!



"너나 그렇게 살아라."라는 말이 목구멍을 난도질하지만, 참았다. 더러운 집구석을 벗어날 때까지는 참고 견디기로 했으니까. 난 곱슬머리에 주근깨가 광대 주변을 덮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곱슬이 약해져 손가락으로 쓰다듬기만 해도 가지런해지지만, 십 대의 내 머리칼은 스트레이스 자체였다. 게다가 주근깨까지. 더구나 비위생적인 집안 사정과 무식한 부모의 아동학대로 인해 양치나 목욕은 할 엄두가 없었다. 테러블에 가장 적합한 상황이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목욕이나 양치는 TV 드라마에서 일반화된 사치라고 생각했다. 실제 우리 동네에 살던 친구들 가운데 양치하는 애들은 드물었고 목욕은 정말 깔끔 떨어야 한 달에 두어 번 가는 정도면 유난맞다고 놀림받았다.


그런데 하물며 옷이야 말을 꺼내기도 부끄러울 수준이었다. 여자 아이 옷이든 양말이든 상관없이 가격만 싸면 내게 던져 주었다. 학교에서 놀림당할 정도로 참을성 많은 성격이 아니라서 함부로 떠들며 놀릴 순 없었지만, 비웃음을 숨기던 표정들은 잊을 수 없다. 나는 패션이나 이미지를 선택하거나 생각할 자격 없는, 패션 월드의 불가촉천민이었다.


그러다 이른 결혼과 뛰어난 머리로 학위를 받은 뒤 사업을 벌여, 삼십 대에 대한민국의 유력 사업가로 성장했다. 돈이나 재산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나는 아무런 욕심을 갖지 못했다. 무엇을 왜 소유해야 하는지에 대해 개념이 없었다. 자동차, 시계, 옷. 성공한 남자들의 취미 거리가 내게는 불필요한 신경만 쓰게 만드는 계륵이었다. 능력이 흘러넘치지만 하고 싶지 않다, 라는 무관심으로 무시했다. 좋아할 기회나 좋아할 이유나 좋아할 가치를 전혀 알지 못했다.


직장 전투복으로 슈트와 셔츠만 늘어갔다. 항상 아내의 몫이 되어 시즌마다 조금씩 다른 슈트와 셔츠를 사 입었다. 게다가 컬러가 든 셔츠가 경망스럽다고 여긴 나는, 아내에게 화이트 셔츠만을 고집했다. 하는 수 없이 아내는 셔츠는 디자인이 조금씩 다른 것들로 구입했고 슈트는 색상을 다르게 교차해 구입했다. 그래봐야 내 눈에는 같은 색이었다. 그리고 나는 슈트는 아르마니, 셔츠는 듀퐁을 선호했다. 넥타이는 별 생각이 없어 아내가 좋아하던 에르메스 등으로 다양하게 차려입었다. 브랜드를 이용해 타인에게 고압적 지위를 일깨웠던 시절이었다. 나는 나보다 내가 입은 옷을 바로 알아채는 사업상 지인들의 눈썰미와 관심에 가끔 심하게 놀라곤 했다. 나는 당시에 BMW와 Benz도 구분 못하던 문외한이었다. 패션이야 더 말할 게 없었다.


그리고 지금 세상으로부터의 모든 해방을 실천하는 지금.
나는 나를 사랑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패션을 나에게 선물하기로 결심했다.




#2. 패션의 완성은 핏이다. 과거를 파괴하다. 


우스갯소리라고 여겼던 "패션의 완성은 얼굴과 몸매다."라는 말에 누구보다 현재는 공감한다.


개성에 맞는 옷차림과 이미지를 만드는 게 패션의 완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완성된 패션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멋지지 않다, 라는 게 문제다.



자기만을 위한 패션, 자신이 만족하는 패션, 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패션 테러리스트라고 당신들이 비아냥거리는 사람이든, 패션을 추구하는 사람이든, 패션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든, 자신의 패션에 모두 만족한다. 자기에게 잘 어울리는 패션을 자기가 잘 알고 있고 어울리게 차려입는다고 생각한다.


패션에 대한 관심은 내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옷이나 패션보다 더 훌륭해 보이는 옷을 발견했을 때 일어난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패션의 완성은 자신의 개성이 아니라, 패션을 주도하는 멋진 옷이 주인공이다.


그래서 내면의 엘레강스니, 품격이니, 하는 모든 입바른 소리에 대해 패션과의 관련성을 해체시키기로 했다. 라거펠트도 말했다. "엘레강스와 패션은 다른 문제이다."라고. 기성복 디자이너다운 개념이다. 나도 너도 우리도 기성복 시대의 기성세대이다. 오뜨 꾸튀르 인양 가식 절은 패션 알레고리로 말을 장식하는 것은 패션에 대한 모욕이다.


그래서 슈트를 벗어던진 내가 기성복의 도열장인 신세계 백화점에서 확고히 깨달았다. 내가 옷에 맞추는 게 가장 빠르게 패션을 품에 안는 방법이라고.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나, 고심했다. 하루 반나절 정도. 그래서 나는 나를 사살하고 새로이 태어나기로 했다.


1. 얼굴은 돈이 많이 드니까 그대로 두고,

2. 염색, 수염, 피부, 치아의 변신을 시도하자.

3. 다리를 길게 수술할 수는 없으니까, 아프니까, 살을 빼고 근육을 키우자.

4. 배를 넣고 목살을 줄이고 가슴을 키우자.

5. 그리고 몸매에 맞는 행동을 해보자.


패션이라는 말이 어울릴 옷에 내 몸이 맞춰지는 과정을 즐기기로 했다. 그리고 그 옷에 가장 아름다운 핏이 설 때, 내 몸의 스펙을 그대로 확정하자. 이렇게 결심하고 패션을 위한 장정에 들어갔다. 그렇게 두 달이 흘렀다.



허리 39인치가 30인치로 줄어 예전 슈트용 셔츠를 입으면 품이 남는다. 그런데 가슴과 어깨 부위는 단단히 부풀어서 맨 위 두 번째 단추가 유난히 벌어진다. 섹시함을 느끼게 만든다. 나 스스로를 섹시하다 느낀 첫 번째 발견이 셔츠의 두 번째 단추다. 아들이 입던 아베크롬비 셔츠가 딱 맞다. 거울에 비친 허리 결에서 헐렁이는 옷감의 나부낌이 미소를 부른다.


아직 갈길이 조금 더 남았다. 엉덩이를 더 부풀이고 허리와 등선이 매끄럽게 오목해지도록 운동해야 한다. 그리고 나잇살에 좀체 떠나가지 않는 목 뒷덜미 살덩이를 떼어내야 한다. 그리고 지금 70%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핏의 완성도를 계속해서 높여갈 생각이다.


좋은 옷은 돈만 줘도 널렸지만, 그 옷에 어울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난 극소수에 입성하기 직전이다.






같이 보면 좋은 내용)

https://youtu.be/UxWu_aZqu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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