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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케집 사장과 음악가 선생

[제국의 화양연화 시리즈]

by 아메바 라이팅

타츠야가 테스에게 몸을 팔아 쓸 수 있는 용돈은 하루 이틀 정도의 술값에 불과했고 타츠야가 용산옥을 향하던 날이면 영교는 모멸감과 우울증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테스에게 타츠야를 뺏길지 모른다는 처절한 불안감은 그녀의 몸과 영혼을 떼어 놓기에 이르렀다.


"나의 심장과 영혼이 그이에게 있는 한 그이는 내 거야."

영교는 타츠야를 위해 몸을 버리기로 했다. 그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 주던 자신의 몸을 버리고서 만이 역설적으로 그녀만의 영원한 사랑으로 타츠야를 묶어 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몇 주 전부터 타츠야와 영교는 신마치 입구의 파이돈이라는 간판을 내 건 사케집을 단골로 삼았다. 테스에게 몸을 판 댓가로 손에 쥔 지폐 몇 장을 꼬옥 붙들고 타츠야가 경성역에 내릴 시간이면, 요시와라까지 기다리다 못한 영교가 중간 지점에서 미리 와 기다리게 된 단골이었다.


싼 술값과 오뎅 맛이 일품이었고 손에 쥔 돈이 금세 사라지지 않을까 하고 근심이던 타츠야에게 쉽게 외상을 그어 주던 일본인 주인장 덕택에 단골이 되어야 하는 당위성이 묵시적으로 형성되었다. 타츠야는 조선인들이 정종이라 부르는 마사무내에 주저 없이 손을 뻗었고 가끔 따뜻이 입에 머금어 데운 마사무내를 영교의 입속으로 흘려주었다. 그럴 때면 일본 가마쿠라 출신이라는 키라 씨가 곁눈이지만 바라보는 방향의 입 끝을 올리며 싱거운 미소를 보냈다.

사케집 주인 키라 씨는 이름과 달리 선하고 소박하며 평범한 동네의 필부였다. 하지만 고향의 호코쿠지와 대나무 숲에 대한 향수는 흔들림 없이 그가 가진 유일한 고집이었다. 외상값은 당연히 갚아야 한다는 도덕관념도 없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논밭에 뒹구는 가축처럼 미련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키라 씨와 친해지면서, 공통된 연민의 감정이 영교와 타츠야의 가슴을 이어 주었다. 키라가 첫 외상을 의심 없이 흔쾌히 받아준 그날부터.


두 번째 외상마저도 웃으면서 그어준 키라를 등지고 가게 문을 나서던 영교는, 별안간 타츠야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다시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타츠야도 별다른 이유를 묻지 않았고 묻지 않은 질문에 영교도 타츠야에게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십여분 정도가 지났으려나, 시계가 없는 타츠야가 담배 두 개비를 여유 있게 피웠던 시간이 지나자, 영교는 가게 문을 열고 나와 문틈 끝까지 다시 닫았다. 타츠야를 향해 힘차게 뛰어 온 영교는 그의 어깨에 몸을 밀어 넣은 채 얼굴을 들어 환히 웃어 보였다. 자신을 향해 환히 웃는 그녀의 모습에 타츠야는 사랑스런 맘을 담아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키라 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성심으로 표했을 것이란 생각에 타츠야는 그녀의 고마운 마음 씀씀이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웃음, 눈짓, 입술, 가슴, 둥글게 들어간 허리, 그리고 아랫도리까지 티끌 하나 남지 없도록 깨끗이 닦아 주고 싶었다. 그것들은 내 것이니까. 잠시 잊었던 그의 소유욕이 등기부등본의 자기 이름이 새겨진 소유주 란을 찾아간 듯했다.

다음 외상값은 타츠야가 키라의 사케집에 당도하기 직전에 치러진 듯했다. 물에 젖은 손으로 기모노 깃을 매부며 키라의 부엌에서 나오던 영교를 타츠야는 사케 다찌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에 젖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종종걸음으로 타츠야에게 달려온 영교는 촉촉한 입술로 반가운 인사말을 뱉었다.

입술보다 사타구니 속으로 손을 뻗어 축축한 영교의 안부를 먼저 확인한 타츠야는 더욱더 영교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쳐야겠다고 다짐했다. 배부르게 어묵과 사케 서너 종류를 얼큰하게 다 마신 타츠야는 키라에게 인사도 없이 가게 문을 열고 나와 요시와라로 걸어갔다.

가는 길 위에서 영교의 가슴속 젖꼭지를 중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놀리며 둘은 술에 취해 흐느적거렸다. 영교의 젖꼭지를 끼워 잡은 타츠야의 중지와 검지는 걸어가는 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가벼운 손놀림을 계속했다. 그녀의 모든 것들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다는 자기 안심이 둘의 빈틈을 빠짐없이 채워 주었다.

요시와라의 여주인은 방세를 내지 않는 타츠야에게 감히 닦달하지 못했다. 그나마 만만하게 여긴 영교를 상대로 여주인은 아르바이트 제안을 건네곤 했다. 물론 방세라는 말 따위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고, 그저 외로운 지성인에게 따뜻한 보시를 하다 보면 상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라는 여주인 나름의 측은지심을 내비쳤다.

흠칫 두 눈썹을 모으며 고민하던 영교는 이내 영혼을 몸에서 떼 내기로 한 결심을 떠올리며, 제가 도움이 된다면 성심껏 하겠습니다, 라고 여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타츠야가 용산옥에서 테스의 성욕을 채워 주기로 약속한 밤 시간에 여주인이 말한 그 외로운 지성인을 만나러 가기로 약속했다.
보성고보 근처에 간판을 올린 빅타 축음기 주식회사의 경성 지사 출입문 앞에서 외로운 지성인의 하인이 저녁 7시부터 영교를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인력거를 빌려준 여주인의 배려로 늦지 않게 빅타 경성 지사에 도착한 영교는 서양 조끼를 걸쳐 입은 사십 대 후반의 남자 하인을 만났다.

하인은 그녀를 뒤로 하고 앞서 걸으며 보성고보 정문을 지나 오르막을 계속 올랐다. 약한 전기 빛이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어두운 윗 골목으로 한 발걸음씩 내디뎌 갔다. 한참을 걷던 남자 하인이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바로 오른편 앞집이 선생님 댁입니다."

검은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빛으로 하늘은 하얀 장막을 누른 듯했고 장막 아래 반사된 별빛으로 선생님이라 불리는 지성인의 집 마당에 우뚝 선 자작나무 몇 그루의 가지들이 흔적을 내비쳤다. 그 흔적을 이정표로 영교는 하인의 발걸음을 잊은 채 문 앞까지 따라잡아 홀로 흔적만을 비추는 자작나무 가지 끝을 바라보았다.

길게 한숨을 내쉬자 하인은 문을 열어 다시 앞장섰다. 넓지 않은 정원 가운데 일본식 연못이 보였고 그 위를 돌바닥 대여섯 개가 이어 붙여진 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의 돌바닥을 지르밟아 건너자 저택의 거실로 들어가는 입구가 오른쪽으로 열려 있었다. 남자는 흰색 바탕에 원모양 무늬가 염색된 천이 덮인 소파의 중앙 자리를 영교에게 안내했다. 그리고 홀연히 남자 하인은 2층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소파 왼쪽의 나무 벽 위로, 모 전문학교 음악과 (쇼와10년 12월), 이라는 굵은 글자가 아래에 박힌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었다.

"아, 음악 하시는 선생님이시구나."

영교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리다, 흐느적거리는 우스꽝스런 지휘자의 몸짓을 따라 우아하게 연주하는 관현악단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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