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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Oct 15. 2020

우연에 기댄 운명 같은 밤 #2

자꾸만 찾아요. 당신과의 공통점을


아마 더블린에만 몇백 개의 펍이 있을 것이다. 특히 시내는 펍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펍은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술집이 아니다. 아이리쉬들에게 펍은 카페가 되기도 하고 식당이 되기도 하고 그저 바쁜 하루 잠시 쉬어가는 쉼표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펍으로 빽빽이 찬 더블린 시내에서 마음에 쏙 드는 펍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한번 찾은 마음에 드는 펍은 소중하다. 외로운 타지 생활 속 친구들과 나눈 슬픔과 기쁨, 지나온 날들에 대한 회환 그리고 다가올 날들에 대한 기대와 불안.. 끝없이 펼쳐지는 이야기와 감정의 소용돌이 속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아일랜드의 펍은 힘든 타지 생활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펍은 시끄럽고 화려한 거리 속 조용히 존재감을 내뿜는 오래된 로컬 펍 포기듀였다.


그는 그랬다. 자기가 아주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다니던 펍이 있다고. 관광객들을 위해 매년 새단장을 하거나, 라이브 뮤직과 같은 화려한 볼거리는 없지만 그냥 이유 없이 그 펍이 좋다고. 그곳엔 많은 추억이 있다고. 그리로 가자고 했다. 나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우리가 다다른 곳은 포기듀였다.




왠지 우연을 만들어 내는 우스운 꼴이 될까 봐 나는 말하지 않았다. 사실 포기듀는 나의 최애 펍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깥의 차디찬 공기와는 대조되는 푸근한 공기. 어두운 조명 속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의 눈. 나는 비로소 마음속 장벽을 없애고 정말 나다운 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조금은 편안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자리를 잡았다. 그가 찾은 자리는 우연히도 내가 바로 전날 앉았던 자리.. 사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날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싶다는 브라질 친구들과 이곳에 왔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앉아 있는 자리에 내가 앉아 있었다. 이제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꽤나 공통점이 있다고... 통하는 게 있다고... 




우리는 기네스와 함께 조금 더 정다운 대화를 나눴다. 그는 여전히 조금 불편한 기색이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말대로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아이리쉬 친구를 한 명 더 사귈 수 있게 된 점이 기뻤다. 내가 그동안 품어오던 아이리쉬에 대한 궁금증을 털어놨고 그는 열심히 대답해주었다. 그 또한 한국에 관심이 있었단다. 원래 게임을 좋아해서 어릴 적부터 한국을 알고 있었다고. 대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한국에 가려고 했단다. 영어 선생님을 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경험해보고 싶었다고. 내가 아일랜드를 궁금해해서 이곳에 왔듯이 누군가가 한국을 궁금해하고 내가 살아온 문화권을 동경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번엔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약간의 술기운이 자신감을 북돋아 이번엔 초등학생쯤 되는 영어를 구사하게 된 것이다. 내가 마음을 열고 용기를 낼수록 우리의 대화는 더 재미있어졌다. 술이 조금 취한 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한국처럼 늦게까지 대중교통이 있지 않은 더블린. 그렇다고 혼자서 택시를 탈 엄두는 나지 않았다. 비싸기도 비싸지만 무섭기도 무서웠다. 더블린에 1년을 살았는데도 택시를 타본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 혼자 탔던 택시에서 안 좋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Let's go to the Globe."

(글로브에 가자!)


집에 어떻게 갈까 망설이고 있던 내게 그가 한 말. 우리는 이미 이전 대화에서 글로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글로브는 나이트클럽인데 내 취향의 노래들이 많이 나와서 친구들과 자주 가곤 했었다. 20대의 에너지가 넘치는 DJ 클럽은 아니다. 오히려 재즈가 나오고 오래된 팝들이 리믹스로 나오는 편안하고 어쩌면 촌스러운 그런 곳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말이 반가웠다. 일단은 집에 가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깐. 우리는 글로브로 향했다.


목요일 저녁, 그곳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상치 못했다. 나는 갑자기 조금 슬퍼졌다. 내 마음과는 다르게 신난 사람들을 보며 조금 더 슬퍼졌다. 왜였는지 모르겠다. 그냥 왠지 내 1년간의 모험이 끝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 1년 동안의 고생, 노력, 성과 그리고 또 다른 시작이 기다리고 있음이 한 번에 너무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 듯했다. 나는 한국 나이로 30살에 처음으로 독립다운 독립을 한 것 같았다. 바로 이곳 아일랜드에서. 그 작은 걸음마를 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What would you like to drink?

(뭐 마실래?)


Pint of Guinness please

(기네스)


우리는 언제 어색한 첫 만남을 가졌는지 모르게 가까워져 있었다. 몇 모금 마신 술잔을 내려놓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춤사위는 엉망이었다. 그냥 노래에 맞춰 몸만 조금씩 흔들어줘도 됐을 텐데... 활발히 움직이는 그의 팔다리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즐거웠다. 우리는 많이 웃었고 어느새 나의 슬픔은 사라져 있었다. 


이제 마지막 노래를 틀겠다는 디제이를 향해 원망 섞인 함성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마지막은 마지막 이리라. 우리는 몸을 불사르기로 다짐하는 듯한 눈빛을 교환하고 흔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손이 내 허리를 감쌌다. 나는 싫지 않았다. 다 끝나가는 내 모험기에 새로운 불꽃이 붙는 것 같았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용기로 그의 몸에 밀착했다. 그렇게 우리는 마지막 노래가 오직 우리만을 위해 흐르는 것처럼 춤을 추었다. 








*3일간의 만남, 9개월의 영상통화 그리고 마침내 연인이 된 이야기를 연재할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시작만 있고 아직 끝은 없어요... 서로 다른 문화 배경을 가진 남녀가 만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지켜봐 주세요:)



1편 읽으러 가기

https://brunch.co.kr/@lullukumi/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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