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파랑 Oct 19. 2020

그럼 그렇지, 로맨스일 리가 없어 #3

하룻밤의 인연으로 남는 게 나았을까?


더블린의 새벽은 차갑다. 작은 몸으로는 도저히 이겨 낼 수 없을 것 같은 뾰족한 차가움에 나의 구석구석은 떨고 있었다. 달콤한 술 냄새가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고 내 안에는 아직도 춤을 추는 작은 소녀가 있었다. 


집에 도착해 그대로 몸을 침대에 던졌다. 따뜻한 이불속 자꾸만 감기는 눈에도 심장은 빨리 뛰고 있었다. 몸은 피곤한데 잠들지 못할 것 같은 몽롱한 기운에 휩싸였다. 자고 일어나면 더 이상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한여름밤의 꿈처럼 지나가버릴 오늘의 끝을 잡고 우리의 만남을 계속 처음으로 돌려보고 있었다.


"Did you go home ok?"

(집에 잘 들어갔어?)


"If you are ok, Can we meet tomorrw?"

(너만 괜찮으면 우리 내일 만나지 않을래?)


그였다. 하룻밤의 추억으로 남기려던 나의 계획. 러닝타임이 정해진 영화의 이야기가 아름답듯 난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가 끝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조금 혼란스러웠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순간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었고 평소에는 내지 않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 뜨거웠던 만남을 미지근하게 이어갈 생각을 하니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너무도 적극적이었다. 우리가 만난 건 목요일. 헤어진 시간은 새벽 4시쯤. 그는 평일에 일을 해야 하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I can meet you at 5."

(난 5시에 볼 수 있어.)


"When do you normally finish your work?"

(보통 몇 시쯤 퇴근하는데?)


"5."

(다섯 시)


오후 5시에 일을 마친다는 그가 오후 5시에 만나자고 하는 것이다. 이 짧은 한마디에서 그의 순수함과 진정성을 느꼈다. 1분 1초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 하는 그의 말에 어딘가 숨겨져 있던 나의 연애세포들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몇 시간 눈을 붙였을까, 오후 3시쯤 일어난 나는 아직도 몽롱한 꿈속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피곤함 때문이었겠지만 어쩐지 피곤함과는 다른 것이었다. 공기 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 누구라도 만나면 어젯밤의 이야기를 자랑하듯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 다시 만날 생각에 느껴지는 설렘 그리고 떨림... 


우리는 시내로 가는 트램의 어느 역에서 만났다. 나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가 정류장에서 합류했다. 다시 수줍은 아이로 돌아간 그였다. 말이 없고 어색해하는 그. 내가 기억하는 어젯밤 그의 마지막 모습과 다른 느낌에 나는 조금 실망하고 말았다. 문자에서 봤던 적극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어색한 첫인사가 나를 둘러싸고 있던 핑크빛 공기를 한 번에 날려버렸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 역시.... 그냥 하룻밤의 추억으로 남겼으면 완벽했을 우리인데. 괜히 나왔다......'


난 후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왔다. 




우리는 한식당으로 갔다. 어젯밤 대화에서 그는 한국음식에 호기심을 보였다. 얻어먹은 게 많으니 마지막 선물이라고 치자 하는 마음으로 데려간 곳이다. 그에게 기대한 것이 무얼까? 어차피 나는 이틀 뒤면 한국으로 돌아갈 몸. 이역만리 타국에 있는 외국인과 로맨스를 꿈꾸기엔 현실적인 감각이 더욱 중요한 나이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런 그에게 하룻밤이 추억으로도 충분하다고, 고마웠다고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늘의 저녁식사는 나의 그런 마음을 전하는 작은 선물이었다.


한식을 처음 먹는 외국인에게 무난한 메뉴인 불고기를 추천해줬다. 너무 좋다던 그는 기대와는 다르게 거의 먹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그는 숙취가 심해 그 정도를 먹는 것도 엄청 힘들었다고....)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니 다시 어제의 우리로 돌아왔다. 끊임없는 대화, 서로를 원하는 눈빛, 달콤한 공기... 이내 난 마음의 빗장을 열고 그저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나를 맡기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우리 둘 다 너무 피곤해했기에... 이쯤에서 우리의 만남을 마무리하는 게 아름다울 것 같았다.


"If you are ok, Can we have a walk?"

(괜찮으면 조금 걸을래?)


"Sure."

(좋아.)


마음의 소리와는 다르게 흔쾌히 그와 걷기로 했다. 


우리는 리피강 변을 따라 계속 걸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있지만 눈앞에 닥친 이별을 피할 수 없었다. 지나간 1년이 원망스러웠다. 지난 1년 동안 이 길을 걷고 또 걸었는데..... 어떤 날은 슬펐고, 어떤 날을 외로웠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하나도 없는 타지에서 그렇게 혼자 아픈 마음을 다잡고 다잡았다. 그렇게 버텨낸 나에게 떠나기 3일 전 내 이야길 들어줄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조용히 내 옆을 지켰다. 가끔 내가 하는 이야기에 대꾸를 해주고 또 가끔 나를 웃게 만들었다. 




"When was your last relationship?"

(마지막 연애가 언제야?)


그는 내게 물었다. 


난 사실 5년간 만나온 남자 친구가 있었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 그래서 어느 순간 우리가 아직도 사귀는 건지 끝난 건지 알 수 없는. 어느새 서로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비밀이 많아진 사이... 그랬다. 그와 나는 분명한 관계가 아니었다. 


"I broke up with my ex two weeks ago."

(나는 2주 전에 전 여자 친구와 헤어졌어.)


그는 전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 2주밖에 안됐다고 했다. 어쩐지 심하게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 그리고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슬픔. 그는 3년 동안 같이 살았던 누군가와 헤어지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단다. 자신에게 잘 대해주지도 않았던 그녀를 원망하듯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아직 그녀를 사랑하고 있구나...




각자의 연인에게서 채워지지 않던 외로움을 안고 있던 우리. 그 외로움의 조각이 만나 마치 하나의 퍼즐을 완성한 듯한 착각에 빠졌었지만 이내 그곳은 제자리가 아님을 깨달은 우리였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동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난 사실 처음부터 왠지 모를 쓸쓸함을 풍기는 그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았고 이유 없이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I know a cool place. If you don't mind we can go there."

 (나 되게 멋진 곳을 알아. 괜찮으면 가볼래?)


복잡한 마음에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나에게 그가 던진 말. 난 여전히 나의 연애와 그의 연애를 생각하며 뒤엉킨 질문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한결 가벼워 보이는 그. 자신이 할 말은 다 끝냈다는 듯 자신감 있게 걷는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기대와 실망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감정의 롤러코스터에서 이제 그만 내리고 싶었다.








*3일간의 만남, 9개월의 영상통화 그리고 마침내 연인이 된 이야기를 연재할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시작만 있고 아직 끝은 없어요... 서로 다른 문화 배경을 가진 남녀가 만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지켜봐 주세요:)


다음 편 보러가기

https://brunch.co.kr/@lullukumi/28


이전 02화 우연에 기댄 운명 같은 밤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