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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이 필요할 때 '현대미술' 어때요?

#07 아라리오 제주시네마

by 향기나
여러분은 '현대미술' 어떻게 생각하나요? 너무 난해하고 뜻을 헤아리기 어렵지 않나요? 현대미술은 보는 이에 따라 해석이 달라 '열려있는 예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해하려는'는 부담을 가지기보다 '느끼고 질문하며 나만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마음으로 감상하면 좋습니다. 그래서 다른 작품보다 집중하게 되고 오랜 시간 머물며 생각하게 합니다. 몰입하고 집중하게 만드는 현대미술과 친해 볼까요?


아라리오 뮤지엄은 서울에 한 곳, 제주에 세 곳 모두 4개가 있다. 서울 안국역 근처에 있는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는 대한민국 근현대 건축의 거장 김수근이 설계한 '공간空間(SPACE) 사옥'을 리모델링한 미술관으로,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독특한 전시장이다.


제주 탑동에 문 닫아 방치되었던 영화관을 현대미술 전시장으로 바꾼 곳은 아라리오 뮤지엄 제주시네마이고 동문재래시장 근처의 모텔들을 인수하여 동문모텔Ⅰ,Ⅱ라는 이름의 현대미술관으로 개축했다. 방치되어 있던 건축물을 현대미술과 결합하여 독특한 전시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이러한 남다른 안목과 열정으로 본인이 수집한 컬렉션을 기반으로 현대아트 뮤지엄을 만든 사람은 김창일 회장이다. 감창일 회장은 지난 40여 년간 수집한 4,000여 점의 현대미술 컬렉션을 가지고 있어 세계 100대 미술품 컬렉터로 선정되기도 했다.

천안종합버스터미널과 신세계백화점 천안아산점을 운영하고 김창일 회장은 '씨킴(Ci Kim)'이라는 예명으로 예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회화, 콜라주, 오브제, 조각, 사진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작품을 제작하며, 일상적인 오브제를 활용한 '레디메이드' 기법을 통해 미술과 삶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사업가, 미술품 컬렉터, 예술가로서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예술과 비즈니스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멋진 분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몰입하고 집중했던 시간을 떠올려 보면 몇 가지가 생각난다.

그중 가장 짧은 집중 시간은 운전면허 실기시험을 볼 때였다. 실기 시험은 2월 봄방학 중이었고, 떨어지면 신학기에 결근하고 시험을 봐야 해서 어떻게 해서든 한 번에 붙어야 했다. T자와 S코스에서 많이 떨어졌고 당시에는 수동 기어 차량으로 시험을 봐서 클러치 조작이 매우 어려웠다. 대부분 기능시험에 여러 번 떨어졌다. 특히 여자들은 실기 시험을 한 번에 붙기 힘든 여러 코스가 있던 시기였다. 한 번에 붙어야 된다는 그 간절한 소망은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설만큼 엄청난 몰입을 유도했다. 겨울인데도 등에 진땀이 흥건했다. 결과는 초록불. 한 번에 합격했다.


한글워드자격증 1급 실기 시험을 볼 때도 엄청난 집중이 필요했다. 주변에서 들리는 타자소리가 무슨 굉음처럼 크게 들려 그 긴장감은 공포에 가까웠다. 눈 감고도 잘 쳐지던 자판이 계속 오타가 났고 손이 떨리고 땀이 흥건했다. 혼자 집에서 연습할 때와는 전혀 다른 마치 총소리가 계속되는 듯한 공간에서의 시험은 애간장을 녹였다. 엄청난 집중력이 요구됐다. 그 결과 한 번에 합격이었다.



또 하나의 긴 몰입은 늦은 나이에 도전한 미술대학 실기시험을 볼 때였다.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던 나는 여러 사정에 의해 마음에 없던 교대를 가게 되었다. 입학할 때 과를 선택해야 했는데 관심이 두지 않던 학교라 교사였던 친구 언니에게 어떤 과를 가면 좋은 지 물어보았다. 이왕이면 예체능이 좋다고 했다. 음악도, 체육도 자신이 없었던 나는 셋 중 그나마 만만해 보이는 미술과를 선택했다.


졸업하고 발령받은 후 학교생활에 좀 적응이 되자 미술대학에 가서 제대로 배워 보고 싶은 꿈이 생겼다. 내 나이 26세였다. 큰 결심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다닐 수 있는 학교를 검색을 해보니 홍익대학교에 야간대학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에도 제대로 미술교육을 받은 기억이 없던 나는 홍익대에 원서를 낼 엄두가 안 났다. 내 실력이 의심스러웠지만 학원 선생님은 나이 든 제자를 격려하고 안심시켰다. 내신이 좋으니까 예비고사를 잘 보고 실기에 집중하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미술학원에 다니며 실기를 시작했다. 그 당시 교사들의 퇴근시간은 6시였다. 퇴근해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학원에 가면 7시가 넘었다. 공부하고 그림그릴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다. 하루 종일 실기 준비를 할 수 있는 학생들이 부러웠다. 여름까지 실기에 매진하고 이후에는 지금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예비고사에 전념했다. 직장 다니며 대학시험 준비를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그림까지 잘 그려야 한다는 것이 엄청난 부담이었다. 하지만 미대 진학에 대한 꿈은 꺾을 수가 없었다.



미술학원을 다니며 난생처음 아그리파, 줄리앙 등 석고상을 앞에 두고 데생이라는 걸 배웠다. 데생은 대상의 외곽선, 전체적인 비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표현하는 관찰력이 핵심이었다. 또한 빛의 방향을 인식하고, 어디가 밝고 어두운지, 반사광은 어디 있는지를 잘 표현해야 하는데 기초 실력이 부족한 나는 어려움이 많았다. 밝고 어두운 곳이 정확히 관찰이 안 되어 급한 마음에 사진을 찍어 외우듯 명암을 연습하기도 했다.

줄리앙‧출처 네이버


입시 실기 시험은 데생 말고도 구성도 있었다. 구성은 두 가지 정도의 주제를 주면 그것을 창의적으로 면 분할해서 한 주제는 검게, 한 주제는 희게 명도 차이를 주며 색을 입히는 디자인이었다. 단계적 색을 사용해 시선이 중심에서 바깥 방향으로 흐르도록 유도해야 해서 시각적 밀도 조절하는 것이 필요했다. 면 분할이 100여 개가 넘다 보니 혼선이 생겨 명도 단계가 달라지면 전체적인 느낌을 망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게다가 어느 한 곳이라도 채색이 안 되면 미완성 작품이 되기에 시간 내에 끝내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색채평면구성 ‧출처 네이버


어느덧 예비고사도 끝내고 실기시험 날이 되었다. 시험 보러 가는 날 두 손으로 들기도 모자랄 만큼 짐이 많아 친구가 동행해 주었다. 물감과 물감 박스, 물통도 여러 개, 붓, 걸레 등 준비물을 잘 챙겨 새벽같이 서둘러 시험장으로 갔다. 오전에 데생, 오후에 구성 실기시험을 치렀다. 얼마나 시간에 쫓기며 긴장하고 집중했는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데생과 구성 시험을 끝내고 나오니 어둑어둑해졌다.


피말리던 시간이 끝나니 걸을 힘도, 손가락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다. 기다려 준 친구와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갔지만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온몸에서 기가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좀 쉬다가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고 집으로 왔다. 한참 후 결과가 나왔다. 불합격이었다. 준비가 충분하지 못한 자의 당연한 결말이었다.


합격은 하지 못했지만 땀 흘린 그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언젠가 아름다운 꽃을 피울 꽃씨가 되어 주었다. 오만방자했던 나에게 불합격의 깊은 여운은 겸손을 배우게 했다. 실패의 뼈아픈 상처는 추운 날 미술가방을 들어주고 밖에서 시험이 끝나길 기다려준 친구, 7년간 결혼을 요구하던 그에게 마침내 결혼을 승낙했다. 불합격이 준 선물이었다. 첫 아이를 낳고 더 만반의 준비를 해서 홍익대학교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따가운 햇빛과 바람으로 소금이 만들어지듯 살면서 집중하고 몰입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생각의 결정체가 커진다. 집중과 몰입나의 성장을 돕고 꿈을 완성시켜 주었다.




아라리오 제주시네마 전시장에는 씨킴(아라리오 김창일 회장)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꿈‧씨킴


무제‧씨킴


무제‧씨킴


권오상 ‧작업복을 입은 무제의 씨킴


현대미술은 처음 볼 때 “이게 뭐지?” 싶어도, 오래 보면 여러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작품 주변을 걸어보거나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해 보면 떠오르는 새로움이 있습니다. 작품에 집중할 때 나의 뇌는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합니다. 몰입의 상태에서는 최고의 지적 능력이 발휘되고 행복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나의 뇌에 신선한 자극이 되는 '현대미술', 자주 만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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