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가 지났다. 선선하다 싶다가도 햇볕 쨍한 날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더위를 탓하게 된다. 경계가 뚜렷했던 사계절은 옛이야기가 되어버렸고 이젠 긴 여름과 짧은 겨울만이 존재하는 듯하다. 그래도 처서가 오기 전만큼의 불볕은 아니니 다행이라 여기며 강아지와 시골길을 산책한다. 발길을 붙잡은 건 그늘을 넓게 펼친 감나무 한 그루. 진한 연두색 감이 가지마다 열린 모양을 그늘 아래 서서 들여다보았다.
이 사소한 풍경이 과거 어느 날 감나무 아래서 울고 있던 아이를 불러온다.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조그만 꼬마애가 주저앉아 떼를 쓰고 있다. 아무리 봐도 주황빛 하나 없는 감을 손가락질하며 갖고 싶다 으름장을 놓는다. 엄마는 아직 감이 익지 않았다 달래 보지만 아이의 고집을 꺾기엔 시간도 마음도 부족했다. 안된다 못을 박고 떠난 엄마가 야속했던 아이는 더 목청을 높였다. 폴짝 뛰고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높이에 애를 태울수록 감에 대한 욕심도 커져 갔다. 그때 감을 갖고 싶던 꼬마의 본심은 그로부터 세월이 한참 지나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에 와선 몽땅 잊히고 말았다.
분해 울며 떨던 고집쟁이 나 대신 나서준 사람은 외삼촌이었다. 옷자락을 펄럭이며 손쉽게 감나무를 오른 그가 둥글고 앙증맞은 연두색 감 네댓 개를 내 두 손 가득 쥐어주었다. 다정한 행동과 달리 말투는 단호했다.
“자, 먹어봐.”
삼촌은 내가 감을 한 입 베어 물기 전까지 떠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결국 입에 물고 씹은 뒤 혀를 털며 뱉어내었다. 다시 씹지도 내려놓지도 못한 채 어물쩍 거리는 내 머리에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몇 번 토닥이던 손이 멀어지고 이내 삼촌도 그곳을 떠났다. 남겨진 건 멋쩍어진 꼬마애와 덜 익은 감 몇 알. 섣불리 따지 않았다면 달게 익었을 것이 영영 익지 못한 채 버려지게 되었다. 그날 뒤로 나는 가지에 열린 설익은 감을 느긋히 바라볼 줄 알게 되었다.
감나무를 오르는 삼촌의 모습. 손 안의 떫은 감. 나직한 목소리. 머리맡을 토닥이던 손바닥. 그것은 시각, 미각, 청각, 촉각, 몸의 온 감각이 동원된 하나의 추상적인 깨달음이었다. 그날의 깨달음을 한 줄의 문장으로 확언해 본 적은 없다. 오직 짤막한 풍경으로만 존재하는 그날은 내가 살아오며 겪은 여러 선택의 순간마다 용이한 잣대가 되어주었다.
언젠가 이 이야기를 삼촌에게 했더니 자신이 한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삶의 지침이 되어줄 깨달음을 주었으면서도 정작 깨달음을 준 본인은 까맣게 모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훈훈한 일화를 널리 널리 소문내야 한단 귀여운 넉살에 나도 삼촌도 그리고 거기 있던 가족 모두가 웃었다.
하지만, 근래 마음 편치 않은 일이 있었다. 사촌 동생에게 책을 사주기 위해 서점에 들렀을 때였다. 그때 동생이 고른 책을 만류했던 경험이 있다. 그것보다는 더 소장가치가 있는 책으로 고르라는 내 말에 착한 그 애는 조금 더 수준이 높아 보이는 책을 골라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동생이 떫은 감을 베어 먹을 기회를, 그리고 떫은 감에서 느낄 수 있었을 추상적인 무언가를 함부로 다뤄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른의 어른스러운 면만을 추구하고 싶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많은 순간 그들의 미운점들을 모방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내게 감을 따주었던 이십 대의 삼촌보다 훨씬 더 많은 나이에 이른 지금의 내가 그날의 그보다 더 어리다.
손에 쥐고 먹어보고 기어코 떫은맛을 느껴봐야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이젠 스스로의 선택에 무거운 책임이 동반되는 나이. 일상의 해로움으로 머리에 뜨거운 김이 가득할 때면 그날 감나무 아래의 풍경이 기꺼이 불려 오고는 한다. 모습과 맛, 감촉 어느 하나 헐어 있는 것 없이 진한 그곳에서 나는 그들과 몇 발치 떨어진 아무개가 된다. 감나무 아래 두 사람을 시작과 결말까지 몇 번이고 되감기 하다 이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던 숨을 느긋히 쉬어 보는 것이다. 그러다 바람 참 시원하다 흥얼거리며 한가로워지고 싶다.
처서가 지나 감이 달아지길 기다리는 요즈음, 옛적 떫은 감의 맛이 문득 입안에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