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와 까바는 사랑입니다
2025년 7월 4일 금요일
1. 이른 아침의 고요한 풍경
곧바로 스페인어 수업을 시작하는 첫날이다. 당연히 월요일부터 시작하는 줄 알았는데 역시 개인 수업이라 바로 연결되었다. 애매하게 기다리지 않고 즉시 스페인어에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기온이 1도 낮았는지 새벽에 좀 추웠다(!) 알리칸테에 도착한 후 48시간 내내 심각하게 덥다고 느꼈기 때문에 매우 신기했다. 침대에 폭신한 이불이 있길래 한여름에 이게 무슨 부적절한 아이템인가, 생각했었는데 다 필요한 거였네. 미리 준비해 놓은 아침을 먹고 15분 정도 걸어서 어학원에 갔다. 오전 9시가 되기 전, 조용한 도시의 분위기가 맘에 들었다. 역시 강제로 일찍 일어나는 루틴은 반드시 필요하다.
쉐어하우스에서 어학원 가는 길에 있는 동네 공원이 예쁘다. 알리칸테 벤치의 가장 큰 특징은 두 개의 의자가 서로 마주 보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람과 수다를 좋아하는 스페인 사람들의 캐릭터가 정말 잘 반영된 모습인 것 같다. 다만 혼자라면 낯선 사람과 애매하게 시선을 교환해야 하는 자리라서 저는 좀 사양할게요.
여행 일정 중 환율이 가장 높을 때 학원비를 결제하게 되었다. 전혀 떨어질 기미가 없는 시기라서 어쩔 수 없었고 그나마 알리칸테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도시에 비해 물가가 싸기도 하고 한달살이를 하면 자잘한 예산을 절약할 수 있으니까. 숙소비와 학원비를 내고 나니 목돈이 훌쩍 빠져나갔다. 외식을 줄이고 알뜰하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한다.
YaHablas는 다양한 엑센트 경험을 위해 여러 선생님들을 교차해서 연결해 준다고 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냥 스케줄이 되는 선생님을 매칭해 주는 시스템인 듯하다. 첫 날 만난 마르티나는 아주 어린 선생님이었는데 이번 수업이 첫 티칭이라고 했다(!) 아니 이 사람들이 나에게 교생을 보내다니! 다행히 수업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우선 제가 아주 열심히 하는 학생이구요, 그녀는 꽤 어려운 문법까지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실력을 갖춘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이탈리아 사람이었는데 (이것도 너무 놀라움) 이탈리아어가 모국어인 마르티나와 한국어가 모국어인 루나씨가 만나서 무려 영어로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상황이 마치 우주 공간에 둥둥 떠있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는 심지어 프랑스어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인사, 가족,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며 수업을 시작했고, “Entonces(그래서)“, “Luego(다음으로)”, “Tener una pausa(휴식을 가지다)”, “Gira la pagina(페이지를 넘기다)” 같은 생활 밀착 표현을 배울 수 있었다.
2. 알리칸테에는 멋진 로컬시장이 있다
두 시간의 수업이 끝난 후 어디에서 점심을 먹을지 고민하는 시간이다. 여행을 할 때는 무조건 구글을 열고 레스토랑을 검색한 후 가까운 순으로 확인하는 편이다. 다들 가는 유명 맛집에는 가고 싶지 않는 이상한 강박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매번 실패하는데 그게 또 나름의 추억이 되기도 한다. 이 날 첫 번째로 선택한 곳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고, 두 번째로 선택한 곳은 어쩌다 보니 전기가 나가서 음료만 가능하다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주변을 돌다가 우연히 Mercat central을 발견했다.
Mercat Centural은 고기와 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대형 로컬 시장으로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후 2시 30분까지 열려있다. 신선한 재료로 타파스를 만들어주는 타파스바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오늘은 너무 더우니까 낮에 술은 마시지 말아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근사한 타파스바를 발견해서 Pulpo&Cava(문어와 스파클링와인) 조합으로 점심을 먹고 있자니 문득 인생이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말을 걸어 뒤돌아보니 스페인어 선생님 마르티나가 남자친구와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선생님도 오시는 걸 보니 이 시장이 매우 핫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주택가, 시내 중심 구역, 해변 등이 모두 매우 가깝고 어디에서든 걸어서 30분이나 버스로 15분 이내에 멋진 바다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알리칸테의 큰 장점이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면 물놀이를 가려고 수영복을 챙겼었다. 다만 사람이, 정말, 엄청나게, 질릴 만큼, 많았기 때문에 바다는 아침 일찍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알리칸테 한달살이 3일차에 만난 해변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시내 중심 구역과 떨어져 있는 쉐어하우스의 동네 분위기와 사뭇 다른 분위기가 놀라웠고, 항구 가까이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 시내 지도를 받아왔다. 뭔가 특별한 게 있을까 살펴봤는데 캐슬이나 박물관 같은 것에는 더이상 흥미가 없다 보니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상관 없지, 알리칸테는 바다가 매우 아름다우니까.
3. 도서관은 행복이야
알리칸테의 대표적인 해변 Playa del Postiguet 바로 옆에는 도서관 Biblioteca Pública Azorín이 있다.
여기에서 스페인어 수업 복습도 하고, 글도 쓸 수 있었다. 나름 오션뷰 도서관인데 햇살이 너무 강해서 블라인드를 쳐 놓은 것이 내심 아쉬웠다. 도서관 스터디룸에는 아기자기한 미술작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알고 보니 Tomi Ungerer라는 프랑스 작가의 작품이었다. 역시 도서관은 행복이다. 에어컨도 있고 미술관도 있고. 공부도 하고 글쓰기도 해서 매우 뿌듯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4. 장기여행을 할 때 아시안마트는 소중해
오늘의 마지막 미션은 아시안 마트 가기.
장기여행을 하다 보니 중국분들(!)에게 많은 것을 의존하며 살고 있다. 김밥김, 도시락김, 라이스페이퍼, 떡볶이 양념, 짜파게티, 비비고만두, 스시마요네즈를 구매했다. 세계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건데 비비고는 어디에나 있는 것 같다. 잠시 CJ 주식을 살까 고민해 본다. 소주도 있고 라면 종류도 많고 비비고만두도 종류별로 있고 매우 만족 드립니다.
저녁식사로 라이스페이퍼를 이용해서 월남쌈을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라이스페이퍼가 안 좋은 건가? 실온의 물에 적셔서 그런가? 단단한 채소 때문에 찢기는 건가? 숏파스타를 넣어서 그런가? 여러모로 애매한 요리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상에서 제일 못 하는 게 요리입니다만, 다음에는 좀 더 잘해볼게요.
5. 데자뷰를 믿어요
여행을 하다 보면 데자뷰를 자주 경험하게 된다. 과학적인 설명에 따르면 뇌가 비슷한 경험을 겹쳐서 느끼는 거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데자뷰의 미스터리를 믿고 싶은 사람. 라이스페이퍼에 대해 불평하는 장면을 꿈속에서 본 적 있다. 지금의 주방과 그릇과 공기가 익숙해. 데자뷰가 진짜라면, 지금 내 모습이 이미 정해진 미래라면,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현재를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뭐 어때, 라며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지만 직장이 없는 것도, 태어난 나라를 떠나온 것도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데자뷰를 볼 때마다 내 삶은 이렇게 정해진 것 같아서 괜스레 안심하게 된다. 이 장면에 와 본 적 있으니까.
오후 7시 정도가 되니까 꽤 선선해진다. 하루 중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건 날씨인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나도 적응하게 되겠지. 옆 방에 사는 Z는 이 더운 날씨에도 아침마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더라. 어쩌면 나도 곧 편안한 몸과 마음으로 알리칸테의 더위를 즐길 수 있을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