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에 없고, 한국에는 있고 – 나의 그리움의 목록

by luna Han 윤영

한국에서라면 슬리퍼를 끌고 나가 3분 만에 살 수 있는 우유 한 통.

세비야에선 그게 하루의 기다림이 된다.

이곳에 와서야, 한국에서 당연했던 것들이 얼마나 특별한 편리였는지 알게 됐다.


1. 편의점 없음

편의점이 없다는 건, 생각보다 큰 불편함이다.

세비야에는 24시간 문을 여는 상점이 거의 없다. 물론 ‘Opencor’나 ‘Supertodo 24h’ 같은 예외적인 가게가 있긴 하지만, 한국처럼 동네 곳곳에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마트와 상점은 평일과 토요일 낮에만 문을 열고, 일요일이면 일제히 문을 닫는다. 약국도 마찬가지다. 응급 상황이 아니면 ‘당직 약국’을 제외하고는 문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주말이나 공휴일을 무사히 보내려면, 미리 장을 봐두는 것이 필수다.

편의점 만이 아니다. 한인마트도 없다.


2. 한인마트 없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에는 한국 라면부터 김치, 고춧가루까지 한 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한인마트가 있지만, 세비야에는 없다.

아시아 마트에서 소스나 건조 면류를 조금씩 구입할 수 있지만, 품목은 한정적이고 가격은 한국의 몇 배에 이른다.

김치 한 통을 만들려면 대도시에서 택배를 주문해야 하고, 배송비(최소 1015유로)와 45일의 기다림은 덤이다.

여기서는 퀵 배송 같은 빠름은 기대해서는 안 되는 항목이다.

여기서는 그리움이 된다.


3. 배달 서비스의 한계

세비야에도 우버이츠(Uber Eats)나 딜리버루(Deliveroo) 같은 배달 서비스는 있다.

하지만 선택지는 피자, 햄버거, 케밥, 중식 정도로 한정적이다.

한국에서라면 귀차니즘의 발현이자 소소한 행복이었던 배달 음식—식구들이 모여 앉아 치킨을 뜯는 그 풍경이, 여기서는 나를 주방으로 불러내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내가 요리해야 하는 곳.

그나마 재료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편하게 배달해 먹던 떡볶이, 순대, 치킨, 족발등이 내가 한국에 가면 먹고 싶은 음식 1순위다.


4. 정수기·생수 배달 없음

한국의 주방 한켠을 지키는 얼음 나오는 정수기.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한국인이 정수기 사업을 하면 대박 나겠다는 아이디어로 몇 년 전 사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사무실에서도, 가정에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소비자가 거의 없어, 몇백 대의 정수기를 헐값에 처분해야 했다는 소문이었다.

실패의 이유를 묻자,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쉬는 시간에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바나 카페테리아에서 음료를 마셔야지, 그 시간을 빼앗고 사무실 안에만 있을라는 거야?”


이곳에서는 정수기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불필요한 사치였다.

하긴, 이곳에는 아침 출근 후 10시에서 11시 사이가 일반적으로 정해진 브런치 타임이 있으니까.


5. 존댓말 없음

스페인어에는 한국처럼 나이·지위에 따라 달라지는 존댓말 체계가 없다.

그래서 한국어를 배우는 이곳 친구들은 존댓말을 배우는 게 어렵다고 말한다.

한 번은 나이 많은 손님에게 “물 한잔 드릴까요?”를 스페인어로 번역하려다, 딱 맞는 높임 표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엔 편하고 가볍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말 한마디에 스며 있는 미묘한 거리감과 예의를 그리워하게 된다.

존댓말은 단순한 말투가 아니라, 서로의 관계를 존중하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6. 사계절과 첫눈 없음

첫눈을 기다리는 설렘이 없다.

연인끼리, 친구끼리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약속도 당연히 없다.

봄과 가을은 달력에서만 존재하고, 겨울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겨울이 춥지 않은 이곳에서, 하얀 눈과 단풍 대신 오렌지 빛 거리가 나에게 계절의 변화를 말해준다.


7. 장마철 없음

여름 장마 같은 긴 우기는 없다.

비 오는 날이 손에 꼽히다 보니, 창가에 앉아 빗소리를 듣는 여유를 누리기 힘들다.

이곳에서는 비 오는 날이 낭만이라기보다, 잠깐 스쳐 가는 사건처럼 지나간다.

그래서 이곳의 우산은 서랍 속에서 잠든 채, 어디 둔지도 잊어버리고 지낸다.


8. 새벽 모임 문화 없음

한국에서는 새벽까지 달린 후 해장국을 먹고 헤어지는 이야기가 흔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경험이 가장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된다.

그들에게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와 그 뒤의 해장은, 한국 드라마 속 장면처럼 먼 이야기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한 잔 술에 함께 나누는 우리의 이야기들은 나의 추억 속에서 머무른다.

그리운 친구들 얼굴과 함께.


한국에선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이, 여기서는 하루를 더 준비해야 하고, 때로는 평생 오지 않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없음이 꼭 부족함은 아니라는 걸, 그래도 살아진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당연했던 편리함들을 하나씩 지워가고 있다.

그래야 이곳에서 적응하고 살 수 있으니까.




오늘도 제 글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마음 덕분에, 계속 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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