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다는 것은 자신의 길을 되찾아 가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우아하게 시간을 잃는 것이다.
-David Le Breton
서울에서 실무수습을 끝내고, 통영에 처음 온 날을 아직 기억한다. 짐은 애초에 강원도에서 서울로 왔을 때 많이 털어버려 이사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처음 낯선 곳에서 지내기 시작하면, 먼 옛날부터 모든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서 그랬듯, 지낼 곳의 위치를 파악하고 주변에 생활환경을 파악하려 했다. 방 안에서 멍하니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첫 빨간날은 '주변 파악'이라는 측면만 놓고 봤을 때, 완벽하게 실패했다. 그나마 소득이라면 바로 앞이라고 부를 만한 다이소가 걸어서 25분 거리라는 사실, 주변에 부대시설이라 부를만한 것은 cu편의점 제외하고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 물론,관사의 위치 자체가 워낙 변두리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도 어플로 여기저기를 돌려보면서 알게 되었지만, 그 순간에는 충격적이었다.
인도마저도 관광지 이외에는 정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기에, 가까운 (25분 정도 걸어서 가야 할) 다이소 가는 길마저도 위험해보였다. 그래서 목표를 '다이소 가기'가 아닌 '동네 구경하기, 가는 김에 다이소는 덤'으로 바꾸고, 동네를 끼고 도는 길을 택했다. 버스가 안 오는 것은 아니지만, 배차간격과 노선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에 그마저도 패스. 처음 온 곳에서 할 일은 적고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걸었다. 오랜만이었다. '걷는' 행위 자체에 집중해본 적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있는 길을 천천히 걷는 것. 서울에서는 걷는다는 것이 늘 어디를 가기 위한 수단이었다. 사람은 어디서나 북적북적했고 정신은 언제나 없었다. 걷는 것에만 집중하니 느껴지는 것들은 내 몸의 목소리였다. 간만에 걷는 것만으로 적당히 차오르는 숨, 머리 위로 불어오는 약간은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 여름도 아닌데 얼굴 가득히 흐르는 땀방울.... 어지간히 몸을 안 돌봤다고 입이 없는 온 몸이 소리 지르고 있었다. 미안했다.
이런 아기자기한 마을을 두 개 정도 지나가야....
다이소가 나옵니다
아직은 3월이니 바다 비린내도 아직은 바다내음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였고, 남쪽이니 춥지도 않아 적당히 해가 지니 땀을 식혀줄만한 찬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니 적당히 걸을 법한 날씨, 바다가 보이는 풍경까지...
바닷길에 몸을 맡기고 걷는다고 무질서하고 내 마음같지 않은 세상이 주는 힘듦을 덜어주진 않았다. 다만, 적어도 잠시 숨을 가다듬고, 몸을 다시 예리하게 세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보이던 지는 노을이 나름 이곳이 주는 입주선물인가 싶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딱히 몸이 한 것은 없었지만 마음만은 여기서의 생활에 대한 걱정으로 전쟁 같았던 하루, 그곳에 의미있는 마침표가 찍혔다. 그렇게, 통영에서의 1년이 시작되었다.
해가 들어가고 나서야 아차 싶어서 찍었다. 대충 찍어도 이정도 사진이 나오는 동네가 통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