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늘 입에 달고 사는 말 중에 하나가 '시간이 없다'일 것이다. 우린 이 말을 대부분의 핑계 앞에 접두사처럼 달아버린다. 물론 그 응용판에 '바빠서~'도 있다.
2014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우리에게는 솔로몬 R.구겐하임 미술관의 설계자로 알려져 있다. 맨 인 블랙에서 윌 스미스가 신나게 뛰어다니던 그 건물, 그거 맞다.)의 <브로드에이커 시티> 3차원 모형이 뉴욕에 다시 복원되어 전시되었다. 미국 도시의 미래에 대한 가장 뛰어난 비전 중 하나인 이 모형에 담긴 사상을 성찰하고, 연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 곧이어 그들은 과거의 사람들이 어떤 비전을 가지고 미래에 본인 후손들이 살아갈 세계를 그렸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할까? 어떤 삶을 살아갈까?
이 모형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모든 주택들에 과하게 큰 '정원'이 딸려 있다는 것이었다. 자세히 확대를 해보면, 이것이 텃밭임을 알 수 있다. 그 옆에는 자동차가 날아다니고 있다. 자동차가 날아다니는 세상 안에 있는 텃밭, 무언가 심히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왜?
1930년 프린스턴 대학교 강의에서 라이트는 미래도시를 풍부한 공간과 여유시간이 있는 곳으로 전망했다. 일과 사생활이 완전히 분리되고 "노동자들은 오전 10시에 도시로 몰려왔다가 오후 4시면 쫙 빠져나갈" 것이다. 일주일에 사흘만 그렇게 일하고 나머지 4일은 <브로드에이커 시티>에서 정원을 돌보며, 삶을 즐기고 자연과 교감한다. 라이트는 아마도 르 코르뷔지에와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건축가일 것이다. 독특하고 풍부한 아이디어를 가진 것으로 유명했던 그의 작품 중에서 <브로드에이커 시티>는 유별나지 않은 편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미래 예측을 꽤나 잘 반영한 작품이라고 한다.
<브로드에이커 시티>, 사진출처: franklloydwright.org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처럼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스 케인스 역시 자기 분야에서는 거인이었다. 그 역시도 라이트처럼 자기만의 <브로드에이커 시티>가 있었다. 라이트가 프린스턴 연단에 섰을 때와 비슷한 시기에 그는 더 큰 경제/사회/정치적 미래 문제를 다루는 자리에 연사로 초청되었는데, 100년 내로 경제적 문제는 해결될 수 있거나 적어도 해결 방법이 보이게 될 것이고, 그 결과 2030년까지 평균 노동시간은 주 15시간이 될 것이며 그 시간조차 경제적이기보다는 인간적 필요를 반영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다만 케인스는 앞에 단서를 "더 이상 큰 전쟁도, 엄청난 인구증가도 없을 거라는 가정하에"라고 붙이기는 했다.)
케인스도, 라이트도 결국 미래에는 기술과 풍요로 비어버리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를 생각하는게 미래사회 인간의 가장 큰 문제일 거라고 했다. 라이트는 그것을 정원이라는 거대한 텃밭으로 답안이 어느 정도 있는 것처럼 자신의 모형에 만들어놨지만, 케인스는 이게 미래의 사람들이 배워야 할 새로운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삶의 기술 그 자체'로서 사람들이 진짜 도전해야 할 문제라고 했다.
그 미래가 와도 우리가 바뀌지 않는다면...
위에 이야기는 내가 이 연재를 시작하기 바로 직전에 읽은 자료다. 비록 아직은 자동차가 날아다니고 있지 않고, 여전히 야근에 찌들어 있는 삶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과거보다는 나은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다행히도 지켜지지 않는 회사도 많지만 어쨌든 주56시간 근로제라는 여러 제도적 장치가 싹을 틔우고 있다. 그러면 위에 두 사람은 물을 것이다. '2023년은 상황이 어떤가? 많은 여가 시간을 사랑하는 이들과 보내고 있는가?'하고 묻는 다면 우리는 뭐라고 답할까. 나라면 굉장히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들이 상상한 도시와는 전혀 다른 도시에서 곧 죽기 직전의 표정으로 사무실에서 보내며 무의미한 삶을 아직 살고 있다 대답할 것 같다. 그리고 더 답답한 것은 2030년, 2040년이 되도 비슷한 답을 할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이 소식을 케인스와 라이트에게 보낸다면 틀림없이 대체 무슨 일이냐는 질문을 받을 것이다 '어떻게 우리의 기대를 저버릴 수 있습니까? 왜 아직도 그렇게 많이 일하고, 그렇게 여유롭고 평안한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란 것은 그저 후세가 행복하길 바랐을 뿐인데? 아직도 어째서...' 그러다 어쩌면 더욱 핵심적인 질문에 맞닥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도대체 온종일 뭘 그렇게 하는 겁니까?'
그래요, 우리는 시간이 없진 않아요.
사실 이번 연재를 시작하면서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우리 주변에는 정말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내 주변만 해도 사무실/연구실에서 사는 친구들이 꽤나 된다. 그들을 우리는 불쌍타하면서 보지만, 적어도 그것을, 그 길을 자신이 선택해서 걸은 친구들은 눈빛이 다르다. 이들에게 이 연재가 의미가 있지는 않으리라, 너같이 시간이 남는 놈이나 이런 배부른 고민하고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진짜 불쌍한 사람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나였다. 적어도 저 사람들은 자기의 일을 하려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근데 나는 어딘가 길을 잃고 헤메고 있었다. 아까 했던 그들의 물음에 내가 변명같은 답을 하자면 이렇다. 나는 누군가의 이웃/직장 동료/스승/형/아들로 살고 있다. 하루에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아마 절반 이상을 그런 역할놀이로 살고 있을거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디지털 기계를 보면서 멍을 때리면서 손가락 하나 안 움직이고 있다고 대답을 해야할 것이다. 그러니까 결론, 나는 시간이 없는게 아니라 온전히 '내가 나인 시간'이 없으니 시간이 없었을 뿐이었다. 온종일 뭘 하냐는 물음에 대한 내 답은 이거였다. 온전히 내가 나인 시간, 그 시간은 분명히 존재 해야만 한다. 그리고 아직은 자동차가 날아다니는 시대가 아니니, 디지털을 끊어내서 시간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혼자있는 정원
내가 이 디지털 끊어내기를 통해서 얻은 것은 라이트가 말한 '정원' 보다는 아무것도 심기지 않은 '노지'에 가깝다고 아직은 생각한다. 이 노지에는 이 연재를 쓰는 시간도 있고, 독서도 있고, 가끔 치는 기타도 있고, 개인적으로 하는 공부도 있고, 운동하는 시간도 있다. 처음에는 혼자 남은 감각이 어딘가 어색하고, 우울할 수도 있다. 아무 것도 열리지 않은 땅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위안을 삼자면, 아무것도 아닌 땅도 땅이다. 그것도 내 땅이다.
앞에서 말한 물리적인 끊기를 다 실행하고 나면, 분명히 이런 공허한 시간으로 만들어진 노지가 생길 것이다. 그때 혼자가 되는, 뭔가 내 안에 큰 구멍이 뚫린 것 같은 그 느낌을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혼자여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혼자여서 괜찮아질 것이다.
이 노지를 이제 내 스타일대로 잘 꾸려나가시길 바란다. 조건은 딱 하나다.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고 다 해도 된다.' 이제까지는 뭐 하지마라 뭐 하지마라, 비워내라만 강조했다면, 그래서 다 비워졌다면, 좋은 것으로 채우는 것만 하면 된다. 개인적으로는 나쁜것을 비워내는 것보다 좋은 것을 채워넣는 것이 더 쉽고 재밌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