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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Nov 29. 2024

할머니, 내가 만든 김치 맛 어때?

다섯 살 인생 첫 김장

지난 주말엔 남편 본가에 김장하러 다녀왔어요.


송이가 가을에 태어났으니 그해는 쉬었고,

다음해, 그 다음해에도 아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엄마 껌딱지 달고 가선 일도 제대로 못할 거고, 괜히 저지레나 해서 일을 보탤 수도 있으니)

건너뛰고 건너뛰어서,

무려 5년만의 김장이었네요.


뭐 그렇다고 설레거나 했던 건 아니지만요. ㅎㅎ

이번엔 허리 아픈 게 며칠이나 갈까, 

이제 마무리했으니 슬슬 집에 가볼까 싶을 땐, 

아마 아침부터 막걸리를 달고 있었을 남편은 작은방에 잠들어 있겠지,

아아 이런저런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하는데^^; 뭣보다 송이가 걱정이었어요.


같이 놀 사촌 아이들도 없고, 하루종일 TV만 보게 하긴 싫고,

아니, TV를 틀어줘도 어느 순간 지루해져서, 

대체 김치는 언제까지 만드는 거냐, 난 대체 누구랑 노냐고 돌림노래를 부를 게 뻔한데.


그래서, 아예 아이를 김장에 참여시키기로 했습니다!



마침 어린이용 고무장갑이 있어 준비했구요.

옷도 김치 양념 묻어도 티 안 나는 빨간색으로 입혔어요.


그냥 촉감놀이라고 생각하자, 

어른들 다 일해도 자기도 옆에서 같이 쪼물락거리고 있으면 심심하단 말은 안 하겠지.

그 정도 기대였는데요.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더라구요!

김치 속 만들기부터 배추에 넣기까지, 힘들단 말 한번 없이, 진지하게 제 몫을 하던데요.


물론 손끝이 아직 야무지지 못하고 어린이용 장갑도 아직 커서, 김치 속이 여기저기 날아다니기 시작했구요.

뒷일이 더 커지기 전 어른들이 살살 달래 이제 송이 몫은 다 했다며 장갑을 벗겼지만요.


그래도 반 가른 배추 세 쪽에나 속을 넣었어요!

송이가 속을 넣은 김치는 외할머니에게 보낼 김치통에 잘 담았습니다. 

저희는 김치 먹을 일이 거의 없지만, 김장은 같이 하고 한 통도 안 가져가면 서로 서운할 것 같아,

제 본가에 한 통 가져다 드리기로 했거든요. 


송이가 같이 만들어서 이번 김치 참 맛있겠다, 어른들이 칭찬하니 엄청 뿌듯해 하더라구요.

송이 고모는 제게도 칭찬인 듯 아닌 듯한 칭찬을 합니다. 올케는 '저런 거' 참 잘 참는다고. 자긴 못 참는다고.


왜, 아이에게 집안일을 시키다 보면 일이 더 많아지고 길어지잖아요.

저는 좀 느긋한 성격이라 일이 길어지는 건 크게 상관하지 않고,

작은 저지레는 그냥 두고 봤다가 나중에 같이 치우는 편이거든요.


집에 어린이용 고무장갑이 있는 것도 그래서죠.

지난 봄이었나, 설거지 하는 엄마 다리에 매달려서 같이 놀자고 조르던 것도 지루해졌는지,

어느 날 자기도 설거지를 하겠다고 달려들었거든요. 

어른 장갑은 너무 커서 그릇을 잡을 수 없으니 송이 전용 장갑을 한 켤레 사줬죠.


설거지는 싱크대 밑이 금세 물바다가 돼서 자주 못 시키지만,

어린이용 칼로 두부 자르기, 버섯 가늘게 찢기, 데친 콩나물에 양념 넣고 버무리기는 송이 전담입니다. 

하원 후 같이 놀다가 제가 "엄만 이제 저녁 준비할게" 하고 일어서면,

"내가 도와줄 건?" 하고 같이 일어서는 송이입니다.


'아이에게 집안일을 시킬 수 있다.'

없던 능력? 특기?가 송이 덕분에 하나 새로 생겼네요. ㅎㅎ 


그러고보면 결혼하고 10년 동안 수십 번을 만나 식사 하면서, 

송이 고모가 본인 아이들에게 (이제 다 커서 중학생, 대학생입니다) 

다 먹은 밥그릇 하나 치우라고 시키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송이 할머니는 어린 아들 딸에게 (그러니까 어린 시절의 송이 아빠와 고모에게) 

집안일을 꽤 많이 시켰다고 해요. 

어른들은 모두 외출한 저녁, 어린 남매가 

누가 설거지하고 청소할지 가위바위보로 정했던 게 기억난다고

송이 고모가 말하는데, 좋은 추억이라기엔 표정이 조금 쓸쓸해요.


'언닌 그게 싫었구나. 그래서 아이들한테 집안일을 안 시키는구나.'


속으로 생각만 하고 말은 삼켰습니다.  


반대로 저희 엄마는 왠만하면 집안일을 안 시키는 타입이었어요.

어른이 되고 결혼까지 한 지금도, 엄마 집에 가서 주방에 들어가려다간 쫓겨납니다.

김치 담글 때 좀 부르라고 해도, (엄만 한해 김장은 따로 안 하고, 그때 그때 조금씩 담궈 드세요)

연락 없이 혼자 뚝딱 해버리시고 맙니다.


전엔 그런 엄마가 참 안쓰럽고, 답답하기까지 했어요. 

이젠 이런 생각도 들어요.

엄마는 손도 빠르고 성격도 급해서, 느린 내가 도와준다고 나서서 걸리적거리는 게 답답했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웃음이 나요.


빠릿빠릿한 엄마에겐 느긋한 자식, 느긋한 엄마에겐 빠릿빠릿한 자식이 오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


제 바램은, 언젠가 송이가 자기 집, 자기 주방을 가지게 되었을 때,

김치까진 못 담궈도, 김치찌개 정도는 맛있게 끓일 수 있는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  


김장 다음날, 

송이 외할머니 댁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며 김장김치를 꺼내 올렸습니다. 


송이는 

"이거 내가 만든 김치야! 내가 만든 김치 맛이 어때, 할머니? 맛있어?"

생색이 대단했어요. 


송이도 한 입 먹어보라고 했더니, 몸까지 뒤로 빼며 절레절레 합니다.

아직 어린이용 김치도 잘 못먹는 다섯살이네요. 


내년 김장김치는 송이도 맛볼 수 있으려나요? 

이번 주말엔 김치를 잘 씻어서 볶음으로라도 한 번 먹여봐야겠습니다.


첫눈이 푸짐하게 내려 아이가 참 즐거워했는데,

어느새 다 녹아가네요.

한겨울 같은 추위가 주말엔 조금 누그러들기를.

이번 주말도 육아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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