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유 Dec 07. 2024

봄아, 우리 아이스크림 놀이 하러 가자!

다섯살 아이가 엄마를 처음으로 구해준 날

제가 사는 아파트엔 작은 실내 놀이터가 있어요.

목욕탕 냉탕 만한 볼풀과 그보다 조금 더 큰 방방, 

미끄럼틀 두 개 달린 아담한 정글짐이 다지만,

대여섯살? 넉넉잡아 일곱살 아이들까지는 제법 땀흘리며 뛰어놀 만 해요.


요즘같이 추운 계절에 실내 놀이터는 엄마들에게 구세주네요.

밖에서 뛰어놀기는 감기걸릴까 겁나는 날씨고, 그렇다고 집에서 뛰게 수는 없고,

가만히 앉아서만 놀기엔 힘이 넘치는 아이들, 하원길에 들러 에너지를 좀 빼주고 갈 수 있으니까요.

  

공동육아의 묘미도 있지요.

보통 서너살까진 놀이터에서도 엄마랑 같이 놀기를 바라는데,

어쩌다 아이들끼리만 노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가 있어요.

놀이에 집중하다 보니 엄마도 안 보이는 거죠.

그럼 엄마들끼리 조용히 눈빛을 주고 받고, 아이들 눈에 안 띄는 사각지대에 모여,

잠깐이나마 속닥속닥 수다를 떨 수 있습니다. 

한 아이가 '엄마!' 하고 부르거나, 우는 소리라도 들리면 바로 흩어져야 하는 짧은 만남이지만요.


잠깐 전화통화를 하거나 화장실을 가야 해 자리를 비울 땐,

따로 말하지 않아도 다른 엄마들이 내 아이까지 같이 지켜봐줄 거란 믿음도 있구요.

한 엄마가 큰맘먹고 괴물 흉내라도 내주며 아이들을 다 몰고 다니면,

다른 엄마들은 잠깐 동안이나마 다리 쭉 펴고 앉아 

내 아이가 노는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만 있을 수 있죠.

아아. 다른 사람이랑 노는 내 아이의 웃음은 왜 그리 예뻐 보이는지요. ㅎㅎ

 

물론 저도 가끔은 그 괴물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힘든 일은 돌아가며 해야죠, 암요.)

그런데 어제는, 제가 잘못된 놀이를 시작하고 말았어요. 


송이는 아기 때부터 엄마가 두 손 잡고 빙글빙글 돌려주는 걸 좋아했어요.

아기 땐 팔 빠질까봐 무서워서, 지금은 너무 무거워져서 서너바퀴 밖에 못 도는데도요.

어제도 놀이터 방방에서 '빙글빙글' 해달라고 조르는 송이에게, 

"한번만이야!" (안 지켜질 게 뻔한) 약속을 받고,

온 힘을 모아 19키로 아이를 돌리기 시작했어요. 

아이는 힘껏 발을 구르다가 재빨리 발을 떼고는 신나게 날았구요.

원심력을 못 이기고 둘이 같이 쓰러져버리는 게 이 놀이의 끝입니다.

물론 한번으론 한 끝나죠. "한번만 더!"를 외치는 아이 손을 다시 잡았는데.  

어, 방금 엄마가 화장실에 간 세살 여자아이 봄이가, 옆에 서서 빤히 저를 보고 있네요.

"같이 할까?"


그렇게 셋이 둥글게 서서 손을 맞잡고 다시 시작한 '빙글빙글' 놀이는 다섯번째 이어지고 있었어요.

왜인지 다른 집 아이랑 해주는 놀이는 딱 잘라 멈추기가 쉽지가 않아요. 괜히 울리게 될까봐 겁나기도 하고. 

옆에서 지켜보던 진이 엄마는 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송이 엄마 괜찮은 거냐고 묻고.

딸쌍둥이 연이네 엄마는 역시 아들엄마는 체력이 다르다며 존경의 눈빛을 보내네요. 

다섯번째 쓰러지면서는 잠잠해진 이석증이 다시 도지는 같은 느낌이 들어요.

봄이는 빙빙 돌 때보다 쓰러지는 게 더 재밌는지 깔깔거리며 웃다, 

비장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다시 제 손을 잡아요. 

이거 봄이 엄마가 돌아와야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애타는 눈으로 놀이터 문쪽을 흘끔거리는데. 


"봄아. 우리 볼풀장에 아이스크림 놀이 하러 가자!"


와. 송이 목소리가 그렇게 멋지게 들린 건 처음이었어요.

무슨 에코라도 걸린 것처럼요.

오빠를 잘 따르는 봄이는 얼른 제 손을 놓고 송이를 따라 볼풀장으로 총총 사라졌습니다.   


송이가 저를 구해준 거예요. 다섯살 인생 처음으로요.


진이 엄마, 연이 엄마도 아들이 엄마를 살려줬다며 감탄했어요.

엄마가 힘들까봐 봄이를 다른 놀이로 유인한 건지, 

자기가 빙글빙글이 지루해져서 다른 놀이를 찾아 떠난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요. ㅎㅎ 

어쨌든 송이 덕분에 빙글빙글 지옥에서 해방된 저는 에라 모르겠다, 대자로 누워 한참을 멍때릴 수 있었어요.


그동안은 엄마인 나만 송이를 구해줄 수 있었는데. 

어찌어찌 높은 식탁에 기어올라가 놓고는 내려갈 방법을 찾아 울고 있는 송이를 보고, 

그 모습이 귀여워 웃으며 안아 내려주었던 순간이 떠올랐어요.

아이에게 첫 마술쇼를 보여주려고 일찌감치 문화센터에 도착해 맨 앞줄에 앉아 내가 더 설렜는데, 

마술사가 입으로 연기를 내뿜는 게 무서웠는지 공연 5분만에 울음이 터진 송이를 안아들고,

송이에게도 마술사에게도 다른 관객들에게도 미안하고 민망해 식은땀 흘리며 강의실 밖으로 내달렸던, 

10미터도 안됐을 출구까지의 거리가 참으로 멀게 느껴졌던 그날도.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다 뭔가 서운해 눈물이 흐르는데, 그게 또 부끄러워 숨고 싶어하는 송이를 데리고,

편의점에 가 아이스크림을 사먹이며 얼른 아이 기분을 바꿔주고 싶었던 제 기분도요.


그런데요. 생각해보면 송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제 뱃속에 자리잡던 그 순간부터 

저를 구해주었더라구요. 


오랫동안 아이를 기다리며 생겼던 우울함과 무력감, 무능감으로부터. 

그리고 몇몇 가족들과의 어긋난 관계로부터도요.


앞으로도 송이는 일부러든 아니든, 많은 순간 저를 구해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나쁜 생각으로부터. 잘못된 길로부터. 권태와 허무함과 두려움으로부터.


그렇게 생각하니 송이에게 또 고마워지네요.

내일은 아빠랑 둘이 할머니네 다녀오겠다고 해줘서 고마웠던 건 아닌 게 아니라 맞습니다. ㅎㅎ

송이가 주말 이틀 중 하루를 엄마에게 선물해줬네요. 

토요일은 해결됐는데, 일요일은 또 뭘하며 보내야 할까요?

다가올 방학이 벌써 두려워지지만 닥치기 전엔 미리 상상하지 않기로 하고요. ㅎㅎ


일단 이번 주말도, 육아팅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