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동아리 동기들 중 제일먼저 결혼한 친구가 있다. 머지않아 아기를 낳았고, 회사일과 육아로 정신없이 바빠진 이 친구와는 어쩔수없이 만나는 횟수가 점점 뜸해졌다. 가끔 궁금하다 보고싶다 조만간보자 안부문자나 나누다, 작년 여름, 이번엔 기필코 얼굴을 보자며 몇년만에 만날 약속을 잡았다. 장소는 친구집 근처. 우리집에서는 한시간 넘는 거리다. 아기엄마인 친구를 만나려면 내가 움직여야 한다. 손해보는것 같은 기분은 털어낸지 오래다.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보드게임에 꽂혀 엄마아빠에게 하루종일 게임을 같이 하자 조르는 딸을 남편에게 맡기고 나온 친구 얼굴에는 약간의 설렘과 홀가분함이 묻어 있었다. 메뉴는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일식돈까스. 인테리어도 화사하니 예뻤고, 20대로 보이는 여자손님들과 커플손님들이 그 화사함에 한몫하고 있었다. 나도 오랜만의 외식이라 신이 나서 메뉴판을 정독하다가 그만, 안했으면 좋았을 말을 하고 말았다.
우리 맥주 한잔 할까?
그땐 아직 시술을 생각하기 전, 배란테스트기에 맞춰 자연임신을 시도하던 시절이었다. 날은 찌듯 더웠고, 버스를 타고 오래 이동한 탓에 속이 좀 니글거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돈까스엔 맥주 아닌가! 그런데, 주량이 많진 않아도 맥주 한두잔쯤은 맛나게 마셨던 이 친구, 왜인지 수줍은 얼굴로 손사래를 친다.자긴 못 마시니 나 혼자 마시라고. 어디 아프기라도 한걸까? 걱정스러운데, 이어지는 친구의 말.
나, 둘째 가졌어.
아아. 아아아아아아아...
순간 친구의 머리 뒤에서 후광이 비치고, 친구의 얼굴은 너무도 자애로워보여, 나는 성모마리아와 마주앉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반면에 나 자신은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아기가 안생긴다고 징징거리면서 대낮부터 맥주나 찾는 이 안일한 자여...
물론 맥주는 마셨다. 맛있게. 축하도 해줬다. 멋지게. 하지만 원래 계획보다 조금 일찍 친구와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은 조금 더 멀고, 외로웠다.
맥주를 좋아한다. 맛있는 초콜릿을 선물받으면 흑맥주를 한 캔 사와 곁들여 먹는다. 내 입엔 끝내주는 궁합이다. 겨울엔 거품이 포근포근한 밀맥주가 땡긴다. 여름엔 싱거울 정도로 가벼운, 국내 브랜드의 라거맥주들로 더위를 식힌다.
시술을 시작하며 그 모든 취향과 욕구와 필요들을 잊어야만 했다. 겨울엔 그럭저럭 참을만했는데,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니 시원한 생맥주 한잔이 간절해진다. 남편도 마찬가지일 터.며칠전엔 싱크대 구석 사각지대에서 머그컵에 맥주를 따라마시다 내게 걸려 등짝을 맞았다.
커피도 좋아한다. 오전이 다 가도록 유난히 잠이 안깨는 날, 여행 가서 평소보다 오래 걷다 지쳤을 때, 기름진 음식을 먹고 나서, 느끼하거나 달콤한 걸 먹을 때. 진하게 내린 드립커피를, 설탕 두 봉지를 넣은 에스프레소나 얼음 듬뿍 넣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자판기커피를, 목이 델 정도로 뜨거운 아메리카노나 고소한 라떼를 찾는다. 한모금 마시면, 너무 쉽게 행복해진다.
커피는 한잔 정도는 괜찮대서, 양을 줄여 매일 한잔씩만 마셨는데, 시험관 이식을 하고 나선 그마저도 왠지 마음에 걸려 못 마시겠다.
그렇게 커피마저 끊은지 일주일이 지났다.
어느날은 맥주가 더 그립고, 어느날은 커피숍에 가서 원두 향기라도 맡고 싶다.
오늘은 맥주다.
주방 한켠에 놓인 (순전히 예뻐서 산) 계량컵이 눈에 들어왔는데, 몇년 전 동네 작은 맥주집에서, 이 계랑컵에 따라 나왔던 생맥주가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