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로 걷는 계약서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말》 당신도 나를 지나쳤다

by 엘리킴


말없이 꺼지는 알람 소리처럼
하루는 예고 없이 시작된다.
기준은 없고, 보장은 없고
단지 ‘수락’과 ‘확인’의 버튼뿐이다.


주어진 지도 위를 따라
나는 존재를 찍고, 흔적을 지운다.
손끝의 진동으로만 일하는 이 하루는
그 누구도 내 이름을 묻지 않는다.


서명도 없이, 도장도 없이
나는 무엇인가를 증명해야 하고
어제는 오늘에게 물려줄 권리도 없다.


비 오는 날, 발끝으로 스며든 시간은
계약이라는 이름의 바닥을 걷는다.
내가 밟는 것은 보도블럭이 아니라
해지될 수 없는 조건들이다.


앱이 멈추면 나도 멈추고
평가가 낮아지면 나의 호흡도 낮아진다.
불안은 어딘가의 서버에 저장되고
삶은 로그아웃 되지 않은 채 흐른다.


나는 누군가의 오늘을 전달하고
누군가의 내일을 정리하지만
정작 내 하루는
끝날 시간이 정해지지 않았다.


그 어떤 규칙도 따르지 않는 이 일상은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다.
나는 이제, ‘이용약관’이 아니라
‘생활약관’ 속에서 숨 쉰다.


오늘도 나를 찾는 알림이
한 줄씩 울리고 있다.
읽지 않은 메시지처럼,
존재하지만 누구도 묻지 않는 이름으로.











from. 플랫폼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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