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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 Sep 14. 2021

다 같이 놀자~동네 한 바퀴~

길고양이와 놀아주기

오늘도 어린 치타에게 해주었듯이,

치타의 새끼 ‘라니와 랭이’에게 갈대를 꺾어서 사냥 놀이를 해주었다.

강아지풀로 놀아 주기 시작했는데 쭈그려 앉는 게 힘들어서 종종 갈대로 놀아준다.


흔들리는 갈대 털 부분이 사냥감이다.

두 마리라서 양쪽에 하나씩 들고 흔들어야 된다.


오른손잡이인 나는 양손으로 빠르기를 조정하기가 쉽지가 않다. 오늘은 ‘라니’가 컨디션이 좋았는지 점프까지 하며 사냥감을 단번에 물어뜯었다. (커버 사진 설명 : 사냥감의 목을 잡고 흔들며 동시에 양 앞발로 펀치를 날리는 중이다.) 이후에 털이 거의 잘려나가 버렸지만, 가지 끝부분을 공략하며 계속 사냥 놀이에 빠져있다.


캔을 하나 따서 젖소와 치타는 두 스푼, 어린 새끼들은 한 스푼을 먹인 다음에 사냥 놀이를 해준다.

배가 고픈 길고양이에게 놀이보다는 먹이가 우선이다.

보상으로 간식은 여유가 없어 못주고 대신 엉덩이를 두드려주며 칭찬해준다.


상가 캣맘 분에게 열외인 젖소에게는 건사료를 추가로 주는데, 먹다가 ‘새끼들의 사냥 놀이’가 부러운지 달려와서 끼어든다.


어미 치타도 놀고 싶지만, 새끼들에게 양보한다.


오늘은 특별히 치타가 반응을 보이길래 놀아주려고 했는데, 라니와 랭이의 놀이 시간이 끝났음에도 랭이가 냉큼 달려와 사냥감을 쫓는다. 치타도 젖소도 라니도 끼어들 수가 없다.


난처하다.

다 같이 놀게 하려면 축구라도 시켜야 되려나?

사냥감을 (내가) 인위적으로 쥐고 흔드니 한 마리 선수만 뛰게 된다.


물론 고양이의 세계에 ‘PASS’의 개념이 있을 수가 없다.


내가 고민하는 이유는 고양이를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의 세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서이다.

직장에서건 어떤 조직에서건 앞에 나서서 하는 자가 월등할수록 나머지는 활동 범위와 기량이 위축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는 자에게 기회를 자꾸 뺏긴다.

분명 다 같이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그 조직의 우위에 서서 자기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려는 권력자와의 관계에 따라 개인의 위치와 활동범위가 좌지우지된다. 권력자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개인은 자기 개성대로 기량을 펼칠 수가 없다.


권력의 힘이 개인의 생각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기를, 그리고 동료를 믿고, PASS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진정으로 공익의 목표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조직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의문이긴 하다.


‘아! 그래서 신은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구나.

그러나 누구보다 함께하시기를 원하시는구나!’


이 글을 올리고 몇 번 수정하느라 머릿속에 맴돌았는지, 새벽에 문득 이런 깨달음이 왔다.


처음엔 이렇게 썼다.

‘그래서 개인의 힘을 길러야 되나 보다.’라고.


글을 수정하는 지금 질문이 잘 못되었음을 느낀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라는 질문 말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을 잊고 있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인생이야 말로 영원까지 후회가 없는 인데,
인간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려고 한다.


역사를 보면 정의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한 가지 이유가 반드시 그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단점이 있지만, 이 세상을 창조하신 자가 절대 원하는 한 가지가 있을 것이리라. 그것은 때론 평화였고, 때론 근면이었으며 부강이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니 원망의 목소리가 나오는 게 아닐까?

지금 이 시대에 원하시는 일은 무엇일까?

그러나 절대자는 인간의 사명대로 쓰지만 그가 절대자는 될 수 없음을 많은 자들이 잊는 것 같다.


인생의 의미가 권력에만 있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개인으로 보면 역시 사랑과 희생이 있기에 공존할 수 있는 것 같다. 어린 랭이가 사냥감을 독차지하려 할 때, 어느 한 마리라도 달려들어 싸움이 났다면, 나는 놀이를 즉시 중단했을 것이다. 사실 치타를 놀아주려는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서 아주 조금만 더 어울려 줬다.


평화가 깨지면 신은 즉시 그 자리에서 떠날 것이다.

신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고 인간의 생각대로 하는 일에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의 세계에서도 신의 뜻대로 생각대로 살며 그 하시는 일에 쓰임을 받기를 많은 자들이 소망하지만, 실상은 정말 정말 어려운 일임을 느낀다.


개인이 보이지 않는 신을 찾는 것이야 말로 인생 최대의 할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엄청난 인생의 길을 예수님이 내었음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랭이는 지치지도 않는지 사냥 놀이를 끝내고 갈대를 안 보이는데 버리려고 들고서 집에 가려는데 쫓아온다.

놀이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나 보다.


그러다 “엄마한테 가”하면서, 기다려 주니 한 동안 바라보다가 똥꼬 발랄하게 돌아간다.


어린아이들이 먹는 것보다도 놀이의 즐거움이 우선순위라, 그 즐거움에 빠져서 밥시간이 되어도 잘 끊지 못하고 먹는 시간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고양이 새끼들을 보면서 이해가 갔다.


사실 나도 어렸을 때 그랬다.

(성인이 된 지금도 하나님을 잊고 자기 좋아하는 것에 빠질 때가 많다.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고 다짐하는 새벽이다.)


배고픈 줄 모르고 논다.

지치지도 않는다.


고양이는 고양이다.


오늘도 나에게 깨달음과 기쁨과 위로를 안겨준 고맙고 귀여운 고양이들이다.






맹사냥중인 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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