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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스 Apr 17. 2017

개강 일주일 전

택배 도착 및 수학 캠프 시험

오전에 수학 캠프를 듣고, 오후에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다 보니, 어느새 첫 학기 개강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개강 일주일 전에 있었던 일들 가운데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을 꼽아보면, 한국에서 선박으로 보낸 택배가 도착했다는 것과 수학 캠프에서 시험을 봤다는 것 정도가 있는 것 같다.


1. 우체국 선박 택배 도착

나는 6 중순 경에 앞으로 살게  미국 주소로 택배를 미리 보냈었다. 내가 이용한 것은 우체국의 선박  택배였는데, 배송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요금이 무척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인터넷을 찾아보니 항공 택배와는 달리 가끔 배송 사고가 일어나서 부친 택배를  받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에 올 때 캐리어에 가져온 짐들은 대부분 토쥬군 용품들이었고, 그 외에는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식기류와 옷들이 전부였다. 그 외의 자잘한 일상 용품들은 전부 우체국 선박 편 택배로 보냈기 때문에, 아내와 나는 하루빨리 그 짐들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우리의 이런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택배는 깜깜무소식이었다.


그러다가, 개강을 일주일 앞둔 8월 중순의 어느 날. 현관문 앞에 한국에서 보낸 낯익은 모습의 박스들이 테트리스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운 여름날에 이 무거운 상자들을 하나씩 하나씩 날라준 USPS(우체국)의 집배원께 얼마나 감사하고 죄송하던지...


마치 타임캡슐을 여는 것 같은 기분으로, 우리는 두 달 전 한국에서 차곡차곡 짐을 넣어 포장했던 박스들을 다시 하나씩 하나씩 뜯어보았다. 그 박스 속 짐들에는 왠지 서울에서 살았던 우리 집의 향기가 배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걸려 태평양을 건너온 박스 속의 손 때 묻은 우리의 물건 하나하나가 어찌나 소중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다행히, 우리가 보낸 짐들은 하나의 배송 사고도 없이 모두 무사히 도착했다.


두 달여가 걸려 도착한 택배들 - 집 앞 마트에서 가져왔었던 '물먹는 하마' 박스를 미국에서 보니 어찌나 찡하던지...


2. 수학 캠프 시험

개강 전 3주 동안 진행된 수학 캠프 수업은 마지막에 시험을 치르게 된다. 시험 성적은 1년 차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님들에게 모두 보고가 되고, 앞으로 재정 지원을 결정할 때도 참고자료로 사용된다. 앞으로 듣게 될 수업들에서 계속 시험을 보게 되겠지만, 수학 캠프 시험은 이른바 '첫 단추'라는 의미가 있었다. 왠지 첫 시험의 결과가 좋으면, 앞으로의 시험들도 잘 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같은 것... 은 아니고. 무슨 시험이든 일단 잘 보면 좋은 거니깐...


다행히도 수학 캠프의 수업 난이도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수학 캠프 강의는 박사 과정 6년 차에 재학 중인 브라질 출신의 파울로가 맡았는데, 이론을 전공하고 있는 파울로는 자신만의 단단한 수학적 백그라운드를 바탕으로 쉽고 재미있게 강의를 풀어나갔다. 덕분에 나는 미리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수학 캠프를 큰 부담 없이 들을 수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수학 캠프의 시험은 오픈북(open book)이었다. 다행인 이유는 일반적인 시험에 비해 오픈북 시험은 준비하는데 시간이 상대적으로 덜 걸리기 때문이고, 불행인 이유는 내가 오픈북 시험에 징크스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수학 시험의 경우는 아무리 책이 눈 앞에 있어도 안 풀리는 문제는 끝까지 안 풀리는 경향이 있다. 개인적으로도 지금까지 오픈북 시험에서는 항상 성적이 좋지 않았던지라, 수학 캠프 시험이 오픈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지금까지 수업 시간에 다뤘던 내용들이 특별히 따라가기 벅차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것인데. 어쩌면 그게 전부 나의 순진한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또한 가슴 한편에 자리 잡고 있기도 했다.


수학 캠프 시험일의 아침이 밝았다. 전날 밤에 미리 시험 시간에 사용할 책과 노트를 가방에 챙겨 놓았던지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는 곧장 집을 나섰다. 그런데 그때, 아내가 갑자기 나를 불러 세웠다.


아내: 오빠, 책상 위에 '정석' 책 있던데, 그건 안 가져가는 거야?
토마스 씨: 정석? (순간 고민에 빠진다)


'수학의 정석'이라... 사실,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오래 했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다시 수학 수업을 들으니 예전에 배웠던 것들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정석 책을 꺼내서 잊혔던 기억들을 '심폐소생' 시키곤 했었다. 아내가 정석 책은 안 가져가냐고 물었을 때도, '대학원 수학 캠프 시험에, 과연 정석이 필요할까'라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이미 가방이 꽉 차고 무거워서 책 하나를 더 넣어가는 것이 좀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내가 이렇게 나를 불러 세운 것은 왠지 운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논리적으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왠지 그 순간에는 꼭 그렇게 해야 될 것 같은 느낌 같은 것.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토마스 씨: 음.. 그래. 혹시 모르니깐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네. 고마워.
아내: (웃으며) 시험 잘 보고 와.


첫 시험이지만, 오픈북이라서 그런지 강의실에서 시험 시작을 기다리는 동기들의 표정이 다 밝다. 하지만, 이미 한국에서 몇 차례 오픈북 시험을 망친 전적이 있는 토마스 씨는 방심하지 않기로 한다.


드디어 시험이 시작되었다. 시험 시간은 무려 세 시간. 자유롭게 본인이 가져온 책이나 노트를 바탕으로 주어진 문제들을 풀면 된다. 단, 랩탑이나 스마트폰과 같은 전자기기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시험 문제는 다행히도 연습 문제를 통해 이미 풀었던 것들이랑 유사한 것들이 많았다. 그렇게 한 문제 한 문제씩 풀어나가는데, 갑자기 중간에 복병을 하나 만나게 된다. 미분방정식 문제였는데, 척 봐도 쉽게 풀리는 식이 아니었다.


그래. 일단 이 문제는 넘어가자. 혹시 얘보다 더 강력한 끝판왕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깐. 다행히도 그 뒤에 있는 문제들은 비교적 수월하게 풀 수 있었다. 결국 아까 그 미분방정식 문제가 오늘 시험의 끝판왕인 것으로 판명 났다. 아직 시간은 충분히 남았으니, '그래. 오늘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나는 끝판왕을 노려 보았다.


그런데. 아. 모르겠다.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감이 안 잡힌다. 한참 동안, 요리조리 다양한 시도를 해봤지만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그 순간! 아침에 아내가 전해준 '수학의 정석' 책이 생각났다. 아. 거기 정석 책에 나와있는 적분 공식들을 한번 응용해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나는 바로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정석 책을 꺼냈다.


아... 미국 대학원 강의실에서 '수학의 정석' 책을 꺼내는 날이 올 줄이야. 이 정석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학부 시절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으로서, 미적분 수업을 듣기 전에 나름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정석 책을 한 장씩 한 장씩 넘겨 나갔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내가 생각했던 그 자리에, 미분 방정식을 푸는데 도움이 될만한 적분 공식이 떡하니 나와 있었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입했던 수학의 정석 - 내겐 여러 가지 추억이 묻어 있는 소중한 책이다


결국. 풀었다. 몇 번이나 검산을 해본 뒤, 답은 이것일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역시 오늘 아침 아내가 나를 불러 세운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이유로, 내 답이 오답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내 나름대로는 만족할 수 있을 정도의 답안을 작성하니 기분은 후련했다.




그리고 며칠 뒤, 수학 캠프 시험 결과가 개인별로 메일을 통해 공지가 되었는데, 결과는 합격(pass)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냥 합격이 아닌 '고득점 합격(high pass)'이었는데, 알고 보니 만점을 받은 것이었다.


오늘의 교훈: 아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사실, 성적을 확인했던 그 순간에는 '첫 단추'를 잘 꿴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앞으로 나는 1년 동안 무려 19번의 시험을 더 치러야 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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