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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스 Aug 13. 2018

첫 학기 끝, 겨울방학

학부 시절, 기말고사 기간만 되면 도서관 자판기 옆에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박카스의 유사품인 코카스의 빈병이 자판기 옆 파란 쓰레기통을 가득 채운 모습, 그리고 유독 자판기에서 코카스에만 '품절' 불빛이 들어와 있는 모습. 그랬다. 그때는 기말고사 기간이 되면 다들 카페인의 힘을 빌어 잠과의 한바탕 전쟁을 벌이곤 했었다. "코카스는 우리의 수명 끝부분을 미리 현재로 빌려오는 신비로운 (그 결과, 수명을 단축시키는) 음료"라는 자조 섞인 농담을 나누던 시절이었다.


한국에 코카스가 있었다면, 미국에는 레드불이 있었다. 수업 전에 커피를 가지고 들어오던 동기들이 기말 시험이 다가오자 하나둘씩 한 손에 에너지 음료들을 들고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트에는 기말고사를 맞이해 에너지 음료들만을 따로 모아놓은 특별 코너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기말고사 기간, 마트의 레드불 광고


"굳이 카페인의 힘을 빌려서까지 잠을 줄이며 공부를 해야 하는가"가 평소의 지론이었으나, 미국에서의 첫 기말시험이 다가오자 생각이 바뀌었다. 일단 시험 범위 자체도 방대했을뿐더러, 나이를 먹어서인지 기억력도 예전 같지가 않았다. 결국 시험을 치르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보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시험 전날 만이라도 자는 시간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아무튼, 마트에서 그날 밤에 공부하면서 먹을 컵라면 하나와 레드불 하나를 사는 모습이 처음에는 어찌나 생경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기말 시험을 준비하던 어느 날.

아침에 토쥬군의 몸 컨디션이 심상치 않다. 갑자기 토를 하더니 계속 설사를 했다. 급히 소아과에 연락을 해 가장 빠른 시간으로 진료 예약을 잡았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를 뒷좌석에 태우고 진료 시간에 맞춰서 병원으로 향했다. 고열 때문에 응급실에 다녀온 것이 불과 2개월 전이었는데, 이번에는 배탈 때문에 병원에 가게 된 것이다. 평소 같으면 나도 같이 병원에 들어갔을 텐데, 이 날은 당장 몇 시간 후에 시험이 하나 있어서 아내와 아이만 병원 입구에 내려줘야 했다. 차창 밖에서 토쥬군을 아기띠에 안은채, 괜찮을 꺼라며 걱정하지 말고 시험 잘 보고 오라며 손을 흔드는 아내를 보니 어찌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아내와 아이를 내려주고 다시 집으로 오는 내내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다행히 토쥬군은 병원에 다녀온 뒤 금방 회복이 되었고, 나도 우여곡절 끝에 첫 학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특히, 기말 시험의 마지막 과목에서 답안을 제출하고 강의실을 나올 때의 그 해방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수학 캠프부터 쭉 달려온 4개월의 여정이 끝나고 이제 3주간의 꿀맛 같은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것이다.


운 좋게 첫 학기 성적도 목표치를 달성해서, 방학 동안은 공부를 잠시 잊고 마음껏 놀기로 했다. 미국에 온 이후로 한 번도 학교와 집을 벗어난 적이 없다 보니, 일단 가까운 곳으로 자동차를 타고 1박 2일로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그래 봤자 집에서 2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떠난 가족 여행에서 우리는 나름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었다.


미국에 온 뒤 처음으로 떠난 1박 2일 동안의 가족 여행


그리고 나머지 방학 기간 동안에는 그동안 못 봤던 한국의 TV 프로그램을 인터넷으로 몰아서 보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내가 당시 즐겨봤던 프로그램은 '미생', '무한도전', '꽃보다 청춘(페루 편)'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미생'을 정말 재미있게 봤었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박사과정 1년 차의 불안한 내 모습에 '미생'의 장그래를 투영시키다 보니, 드라마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찌나 생생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박사 과정 1년차 겨울방학에 많은 위로를 받았던 드라마, 미생


당시 '미생'을 보며 특히 마음에 와 닿았던 명대사들을 수첩에 옮겨 적었었는데, 몇 개를 소개해보면.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함을 찾기 마련이고, 그러다 결국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면 승부 따위는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이기고 싶다면 충분한 몸, 체력을 먼저 만들어라.
마음속에서 몇 번의 전쟁을 치러야 저런 확신과 신념을 가질 수 있을까.
잊지 말자. 나는 어머님의 자부심이다. 모자라고 부족한 자식이 아니다.
기초 없이 이룬 성취는 오르는 게 아니다. 성취 후 다시 바닥으로 돌아오게 된다.
반복에 지치지 않는 자가 성공한다.
취해 있을 수 없다. 돌을 잃어도 게임은 계속되니까.
버텨라. 그것이 이기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다 미생이다.


드라마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던, 그리고 미국에 온 뒤 처음으로 공부는 잠시 잊고 푹 쉴 수 있었던 겨울 방학이 그렇게 끝나고, 이제 두 번째 학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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