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멀스멀 다가온 눈구름이 하늘을 뿌옇게 물들인다. 바람결에 희미한 눈발이 흩날린다. 하늘에서 추락한 하얀 몸뚱이는 땅으로 꼬꾸라진다. 가장 높은 곳에서 쏟아져버린 백색은 하늘 아래보다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그저 하얗게, 또 하얗게.
하늘의 것으로 두텁게 둘러싸인 세상은 하릴없이 소리를 빼앗긴다. 새하얀 껍질에 흠집이 나는 순간 세상은 겨우 초침을 다음 칸으로 옮긴다. 차가운 색만 남긴 채 적막으로 뒤덮인 눈부신 세상은 한없이 고요할 뿐이다.
고독한 만큼 아름다운 날이다.
눈밭
한겨울답게 함박눈이 내린다. 한없이 퍼붓다 잠깐 쉬는 사이 공기를 타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눈송이가 신기하다. 다시 저 위로 가고 싶다는 듯 바람 길을 타고 솟구치는 모양새는 자유롭기까지 하다.
오후 햇살이 빠끔히 고개를 들이민다. 어느새 눈은 땅의 것이 되었다. 발을 움푹 꺼트릴 만큼 아래를 차지해 버리곤 처음부터 거기에 속했던 척을 한다. 하지만 애초에 근본을 바꿀 순 없기에 바닥을 디디며 생을 지켜온 것들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렇게 눈밭은 짓밟히며 '뽀드득, 뽀드득' 비명을 지른다. 온몸이 짓이겨지는 고통을 알아달라는 듯이. 땅 위를 훑으며 살아온 자들이 지나간 자리는 회색빛 시체를 켜켜이 쌓아 올린 희끄무레한 무덤이다.
눈밭 위 발자국은 하얀 절규에 리듬을 얹어 경쾌할 만치 천진한 잔인함을 담아 새겨진다.
바람소리
창밖으로 바람이 몸을 부대낀다. 기다란 공명음은 구슬픈 한숨으로, 때로는 불길한 흐느낌으로 울려 퍼진다. 그렇게 바람은 날카롭게 불어와 금이 간 형체를 부순다.
힘없이 널브러진 거죽 대기를 흔들어대는 나무와, 창백한 민낯을 드러낸 빛바랜 건물 외벽과, 차갑게 얼어붙은 불투명한 유리창에 맞부딪치는 소리가 허무를 닮아간다. 갈 수 없는 길을 찾아 몸부림친다.
바람소리가 멎는다. 휘몰아치던 노랫소리는 이곳을 맴돌다 끝내 사그라질 것이다. 목적지에 다다를 방도가 없는 마음은 끝내 닿지 않는다.
겨울잠
낮보다 긴 밤에 잠이 든다.
한껏 웅크린 몸이 작은 온기를 찾아 바스락댄다. 밤눈이 어두운 사람에겐 특히 고된 날이기에 그저 가만히 누워 겨울을 꿈꿔볼 뿐이다. 추위에 곱아 든 손가락을 하나씩 조심스레 펼쳐 보는 몸짓이 아리다.
오늘 맞이하는 밤은 어느 때보다도 어둡다. 차가운 공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시간, 곤히 잠을 청하는 마음에 검은 물이 든다.
사랑하는 검정
가장 좋아하는 색을 묻는다면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색이라 할 것이다. 빛도 소리도 짙게 가라앉히는 검정. 잊고 싶고 없애고 싶은 것과 간직하고 싶은 것 모두를 공평하게 덧칠해버리는 검정을 사랑한다.
아무것도 없으나 전부를 품은 그 속에서 하염없이 침잠하며 가만히 녹아내리는 건 어떤 삶일까. 나는 그런 끝을 원한다. 내 마지막 숨결에 검정이 묻어나기를 바란다. 불투명한 형체로 빚어낸 그릇에 온갖 색이 뒤섞여 휘저어지기보단 마음도 영혼도 까맣게 채워져 그 단 한 가지 색으로 깊고 아득한 평온이 담기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