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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민트 May 01. 2022

이 기구 사용법 좀 알려주세요

헬스장 탐구 소설

한 번 시작하니 멈출 수 없다.

점점 운동하겠다고 나가서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졌다. 벌써 한 달째.

하루가 멀다 하고 빨래하느라 몸은 고되지만 기분은 최고다. 조만간 레깅스와 속옷, 티셔츠를 몇 벌 더 사야겠다.


최신 기사를 보니 무산소 운동을 먼저 하고 유산소 운동을 하는 게 체중감량에 효과적이란다. 근력 운동으로 기초대사량을 올린 상태에서 살을 빼는 게 훨씬 수월하다고 연구 결과와 함께 소개했다. 이 놈의 연구 결과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자고 일어나면 뒤집혀있기 마련이지만 솔깃하다.




"이 기구 사용법 좀 알려줘."

자존심 상했지만 하는 수없이 남자에게 요청했다. 이곳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한참 자기 운동에 빠져있는 낯선 이에게 다짜고짜 '당신 운동을 중단하고 날 좀 알려줘요' 요구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막무가내 철판 이기심이 어딨는가. 저 사람도 시간 내서 운동 나온 건데! 개중에는 '그냥 PT 받아요. 아줌마'하는 심정인 사람도 있을 게다.

 

지난 사건 이후 남자가 헬스장에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라졌다.

묻지도 않았는데 언제 내 옆에 와서 이러쿵저러쿵 참견하고 간다. 새삼스레 나긋나긋한 행동이 더 짜증 나서 말 한마디 지 않고 내 운동만 했는데 이게 웬일일까.    


그러고 보니 일주일 전 주문한 레깅스랑 브라탑 보고 기겁했던. 그때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속에 입을 브라탑이지만 걸쳐 입고 거실에서 패션쇼 좀 했더니

눈이 휘둥그레. "이걸 진짜 입을 건 아니지?" 한다.


"아니, 이게 왜. 운동복인데. 요즘 다들 이렇게 입잖아." 배에 힘 꽉 주고 말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당신이 애엄마인 걸 기억해!'하고 씩씩거리며 사라지더니. 그 후부터 운동 가르쳐줘야 한다며 내 동선을 따라붙는다. 커플 운동 나온 사람들, 다정한 그들을 부러워하며 같이 운동하자고 해도 바쁘다고 퇴자 놓던 사람이. 어떻게 스케줄을 조정해서 나 운동 나오는 시간 즈음 먼저 나와 운동하고 있다.


이 남자 좀 귀엽다. 아줌마 배 누가 본다고. 초콜릿 복근도 아니고, 순두부 뱃살 달고 있는 여자 누가 본다고. 그래도 자기 여자라고 신경 쓰고 있네. 살짝 눈가가 촉촉해진다.


그냥. 낡은 콩깍지 하나 끼고 사는 저 남자 애처로워서라도, 진짜 초콜릿 복근 달아야겠다 싶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이 참에 콩깍지도 새로 갈아 끼고.




레그 프레스(leg press), 레그 익스텐션(leg extension), 시티드 레그 컬(seated leg curl), 레그 컬(leg curl) 등 하체 운동. 시티드 로우 머신(seated row machine), 스탠딩 래터럴 레이즈(standing lateral raise), 체스트 프레스(chest press), 업도미널 머신(abdominal machine) 등 상체 운동. 이름도 생소한 몇 가지 기구 사용법을 간단하게 배웠다. 사실 남자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힙 어덕션/어브덕션(hip adduction/abduction)은 가르쳐주긴 했는데 남사스러워서 원. 딱 보기에 형틀같이 생겨서 대체 뭘 시키려는 건가 의구심이 들었다. 시연을 보여달라 하니 아니나 다를까 다리를 양옆으로 쫙쫙 벌리기 시작했다. 크고 넓게 아주 쫙쫙. 여염 아낙네가 밖에서 다리를 이렇게 벌릴 일이 산부인과 외에 더 있을까 모르겠다. 어휴. 얼굴이 화끈거려 중둔근이고 뭐고 칼 거절.   


그러나 그보다 더 난감한 건 힙 쓰러스트(hip thrust)였다. 이 기구 역시 범상치 않은 외양인데, 흡사 변태 성욕자를 다룬 영화에 나올 법한 모양새다. 어떤 자세가 연출될지 눈에 훤해서 거절했는데 자꾸 권해서 마지못해 해 봤다. 누워서 하체를 들어 올리는 동작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예상대로 꽤 민망했다. 이 기구를 통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것 같다. 안녕. 둔근 강화 운동은 이 기구 아니어도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다.




이렇게까지 자상하게 알려줄 줄은 몰랐다.

내심 기분 좋았지만 '운동에 집중해야 해'하며 새침하게 남자를 쫓아내고 본격적인 근력 운동에 돌입했다.


후우 후우

숨은 코로 마시고

입으로 뱉는다.


힘줄 때 뱉고

돌아오면서 마신다.


힘줄 땐 빠르게

풀 땐 천천히 움직인다.


수년 전 주민센터 필라테스 강의에서 배운 기억을 더듬으며 아주 오랜만에 재현해봤다.


발목 뒤. 골반 아래. 가슴 바깥. 등 가운데. 팔 안쪽

그밖에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근육 단위 하나하나, 세포 조직 각각이  신나서 소리 지르는 것만 같다.  '그래 맞아. 나 여기 있었어!' 룰루랄라. 저마다 내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춤추고 있었다.


* 다음화에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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