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볼 만하지. 그런데 여자 몸은 여자가 알아. 남자가 잘 모르는 그런 거 있잖아. 여자 트레이너가 더 잘 알고 꼼꼼하게 알려줄 거야. 여자한테 받으래도.” 또 시작이다.
헬스장 등록할 때부터 PT얘기가 나오면 남자는 ‘여자 트레이너’한테 한 번 받아보라고 했었다. 자기가 봤는데 잘하더라고. 그의 얘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남자 트레이너들은 죄다 더듬는 변태다.
나도 동성인 여자가 편하지만
그가 나한테 적극적으로 자세 잡아 주겠다며 접근했는데, 굳이 헬스장에 한 명뿐인 여자 트레이너에게 받겠다고 거절하는 것도 좀 촌스럽다. 그건 트레이너라는 직업인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그들은 직업인으로서 본인의 직무에 충실하여 상대의 신체에 손을 대는 건데, 그렇다고 믿는데, 잠재적 변태로 간주하고 피하는 게 예의는 아니니까.
예약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러닝머신에서 쿵쿵 쿵쿵 뛰고 있는데 누군가 날 멈춰 세운다. 트레이너다.
먼저, 그는 나를 스쿼트 구역으로 이끌었다. 엉덩이 쭉 빼는 동작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던데. 씁.
“회원님은 머신 주로 쓰던데 지금 그거 할 때가 아니에요.”
다리를 어깨너비보다 넓게 벌리고 두 손을 모은 채 위에서 아래로 서서히 앉았다 서는 동작을 반복했다. 엉덩이는 '오리궁댕이'를 만들어야 한다. 스쿼트는 자기 체중을 이용하기 때문에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든 할 수 있는 훌륭한 다리 근육 강화 운동이라고 한다.
"거울을 똑바로 보세요. 자기 몸을 보라고요."
그렇다. 난 거울 앞에 서고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외면하고 있었다. 드레스코드(?)에 맞게 입고도 대형 거울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내 몸을 보기 어려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괴로웠다. 신통한 레깅스 힘으로 배는 딱 붙었는데 다리는 생각보다 굵다. 내가 몰랐던 내 모습이다. 레깅스만 안 입었어도 나만 알았을 텐데. 그런데.
"몇 번 더 하실래요?"
세 번만 하죠.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대로 넘어갔다. 휴. 체벌받는 기분이다. 어떻게 대충 끝내고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상체 운동 구역으로 이동했다.
그는 내가 주로 사용하는 기구 몇 가지에 나를 앉히고, 내가 알지도 못하는 부위에 힘을 주라고 했다. 손으로 짚어주며, '견갑을 조이고 광배근을 수축시키라'는데. 별 감각이 없다. 그냥 전부 등 아닌가?
와이드 풀다운(torque wide pulldown rear)
가슴 내밀고 허리 펴고 복근에 힘을 준다. 팔이 아닌 등 근육을 사용하도록 유의한다.
팔을 끝까지 내려야 광배근을 자극할 수 있다.
*광배근 : 엉덩뼈와 아래쪽 척추뼈에서 넓게 일어나 점점 좁아지며 위팔뼈에 붙은 등에 있는 근육 <표준국어대사전>
랫 풀다운(lat pulldown)
견갑골 조이고 바가 윗가슴선까지 내려오도록 한다. 허리가 아닌 복근에 힘이 들어가도록 신경 쓴다.
*견갑골 : 척추동물의 팔뼈와 몸통을 연결하는, 등의 위쪽에 있는 한 쌍의 뼈. <표준국어대사전>
시티드 로우(seated row)
어깨 접고 견갑골 접은 상태에서 손잡이를 당긴다. 승모의 발달을 방지하기 위해, 팔꿈치를 지나치게 당기지 말고 아래로 내려 광배근을 수축한다.
복잡한 얘기 같지만 사실 '승모근 자라지 않게 주의하며 등 근육을 단련하라'는 거다.
물론 복근에 힘주고.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좋았다.
“금나미 회원님, 이제 상담 데스크로 가시죠.”
회원카드에 신상 정보를 적어내려 갔다. 생년월일은 대체 왜 있는 건지. 아무튼 너무도 생소한 그 숫자 - 멋쩍어하며 40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인바디 기기에 올라가 양팔을 좌우로 벌리고 섰다.
검사지를 보더니 근육이 많을수록 좋은 거란다. 다리 근육은 평균 이상이지만 내장지방은 관리 좀 해야 한단다. 이건 뭐 굳이 검사 안 해도 아는 내용이다.
그리고 문제의 그 발언.
“회원님은 거북목이고요. 등이 심하게 굽었어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심해요. 가만히 뒀다가는 꼬부랑 할머니처럼 될 거예요.”
나이 40인 것도 아직 소화가 안되는데 꼬부랑 할머니를 언급하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챙겨 입은 노랑 티셔츠 분홍 모자 머쓱하게.
"선천적으로 운동 능력이 떨어지는 몸인데다가,
지금 운동이 아니라 노동을 하고 있어요. 뭘 알고 하셔야죠. 몸 상하게.”
이제 막 폼나는 헬스장갑과 함께 '세미 체육인'으로 거듭난 내게, 자신감 뿜뿜 하던 내게 감히. 우우우움.
그때 분명 내 얼굴이 울그락붉으락했을 거다. 눈치가 있었으면 그쯤 해서 그만뒀을 텐데. 고작 이십 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애송이 어깨 깡패 놈은 속도 모르고 폭격을 이어갔다.
“기본 6개월에 240만 원. 주 2회예요. 제가 식단부터 생활습관까지 다 관리해드릴 거예요.”
“제 회원님들은 한 번 등록하고 나면 단 한 분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건강을 위해 이 정도는 투자하셔야죠.”
그 길로 바이 바이. 속으로 말했다.
‘이 누나가 너보다는 하나 더 아는 게 있어.
영업을 하려거든 먼저 기분을 좋게 해야 해. 사람 불쾌하게 해 놓고 뭘 팔아먹겠다고.‘
집에 오자마자 모자부터 내던졌다.
그나저나 저 자식과 동선 겹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동안 지켜봤다고 한 것도 불쾌하고 다시 마주치면 화가 치밀어 올라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