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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토리 Sep 22. 2024

존재의 인식

그저 스쳐지나갈 뿐

2011년 1월.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만 살았던 그녀는 대한민국에 이렇게 추운 곳이 있다는 사실을 24년 인생 처음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강원도도 아니고 '경기도 파주'라는 이곳이 이렇게나 추운 지도 처음 알았다. 그러면서 대체 강원도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그 추위에서 어떻게 사는 걸까 의아해하며 그쪽 지역은 최대한 미루고 미루어 나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단 사령부에 흔치 않은 여군 초임 - 갓 임관한 - 장교였다. 처음 사단에 갔을 때, "우와! 우리 사단에 10년 만에 소위가 왔어!"라는 소리를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들었다. 그녀가 하는 일의 직책은 소위 또는 중위 계급 모두가 가능한 직책이었는데 항상 중위들만 왔지 '따끈따끈한 신입'인 소위가 온 적이 거의 없었다나 뭐라나. 그래서인지 사단의 모든 이들은 그녀가 뭐 하는 사람인 줄은 몰라도 "새로 전입 온 여군 소위, 걔!"라고 하면 모두가 알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위병소에서 "유 소위님 출타하셨습니다. 유 소위님 교회 가셨습니다. 마트 가셨습니다." 하며 모든 것이 공유되었을 정도라니. 지금이라면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떠오르는 사안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녀는 자기소개 하나 하지 않았지만, 이미 달갑지 않게도 모두가 아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시간이 흘러 점차 업무와 부대 분위기에 익숙해져 가던 어느 날, 그녀는 업무 협조차 관계부서에 들렀다. 그녀를 본 해당 부서장(이하 '참모')님은 그녀를 보더니 '잘됐다'라는 표정으로 다짜고짜 물었다.

"그래, 또래들이 보면 생각이 다를지도 모르니까. 유 소위야, 이 중에 누가 제일 나은 것 같니?"

그러면서 A3에 출력된 문서를 보여주었다. 종이에는 남군 3명의 사진과 그들이 신상이 적혀 있었다.


전속부관 선발 대상자 명단


그랬다. 부대 지휘관인 사단장을 경호하고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전속부관"이라는 임무를 수행할 인원을 선발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서였다. 한 명은 육군사관학교, 다른 한 명은 육군3사관학교, 나머지 한 명은 학군사관(ROTC) 출신이었다. 대충 내용을 훑어보니 현재 소대장 임무를 수행 중인 소위들이었고, 웬만한 무도자격증은 다 가지고 있었으며, 임관성적, 교육성적 모두 출중한 인원들이었다. 아버지가 군인이었던 탓에 군에 대한 생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던 그녀는 대번에 이렇게 말했다.


"에이~ 참모님,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는 것 아닙니까? 어차피 육사, 이 친구 뽑으실 거 아닙니까?"


소위, 아니 중위 진급을 앞두고 있는 중위(진) - 중위 진급예정자 - 주제에 10년도 더 나는 짬 차이의  참모에게 대놓고 저렇게 말할 수 있는 배짱이 누구에게 있을까? 도대체 당돌한 건지, 개념이 없는 건지.


"얘는 어떠냐?"

의외로 대수롭지 않게 어차피 답정너라는 그녀의 질문을 회피한 참모육사 옆의 다른 인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누굽니까? 아는 인원이십니까?"

"내가 GOP대대장 할 때 데리고 있던 소대장인데, 애가 참 성실하고 똑 부러지고 괜찮거든."

"음~ 다 비슷비슷한 것 같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얘 되게 괜찮은 놈인데..."


최종 결정은 사단장이 할 테지만, 아무래도 불안해서였을까? 괜찮은 선발직위는 수능칠 때부터 남다른 육사 출신들이 도맡아 한다는 편견이 지배적이었던 시절이라 그런지, 선발 책임자였던 그 참모는 객관적인 지표로 봤을 때, 본인이 지명한 '3사' 출신 인원이 경쟁력이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나 보다. 사단장도 참모장도 모두 육사였으니까. 그녀는 빈말이라도 참모가 원하는 답은 끝끝내 주지 않았다. '어차피 안 될 것을. 너도 괜히 기대하고 있을 텐데, 참 안 됐다.'라는 생각을 속으로만 삼키며 그에게 나름 심심한 위로를 했다.


그렇게 그녀는 그에 대한 존재를 사진으로 아주 잠시잠깐 인식하고는 그 사무실을 나옴과 동시에 까맣게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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