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yla Oct 25. 2022

저는 골치 아픈 번역가입니다

일의 기쁨을 찾아서

출판사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영어 콘텐츠를 기획하던 시절입니다. 당시에 원어민 성우들과 녹음 작업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한번은 여느 때와 같이 원고를 작성한 후, 여러 차례 읽고 수정을 한 후 최종 원고를 들고 녹음실에 갔습니다. 그런데 해외 원어민 성우가 녹음 부스에 들어가서 원고를 읽자 그때야 비로소 문법 오류를 알아챘습니다. 정확히 어떤 오류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원어민이라면 당연히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종류의 오류였을 겁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원고에 빨간 줄을 긋고 수정을 한 후 수정한 원고로 다시 녹음을 요청했고, 무사히 녹음을 마쳤습니다.


그때 굉장히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저는 작은 글씨지만 책 안쪽에 이름이 찍혀서 출간이 되는 책 한 권 한 권이 소중했고, 녹음 작업 또한 실수가 없도록 하느라 녹음실에서는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어민 성우는 원고를 읽으면서 문법 오류를 지적하지 않고 그대로 녹음했습니다.


아니 이 오류를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지?


제가 그 자리에서 원고를 수정해서 녹음을 다시 요청하지 않았더라면 문법 오류가 있는 문장을 그대로 녹음해서 CD로 제작할 뻔한 것입니다. 그때 당시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원어민이면 문법 오류 정도는 읽어보고 알려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어떻게 주는 대로 그대로 읽기만 하지? 게다가 이건 어린이용 교육 콘텐츠인데! 어린이들이 잘못된 영어 콘텐츠에 노출되면 정말 안되는데... 외국인들은 계약서에 명시된 업무 범위를 절대 넘어서 일을 하지 않는건가?너무 진정성 없고 실망스럽군... 원어민 성우 시간당 페이가 얼만데...!






벌써 10년도 더된 이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 건, 번역가로 일하면서 제가 원어민 성우와 비슷한 처지에 놓였게 때문일까요?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니 이제야 비로고 당시 성우의 태도가 절반은 이해되었습다.


번역가로서 제 역할은 국문으로 된 원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고, 고용주가 에게 기대하는 것은 최종 결과물을 기한 내에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문의 내용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다면?


사실 원문 작성자의 손을 떠난 원문에 다시 의견을 붙여서 수정을 제안하는 것은 번역가로서는 굉장히 비생산적인 행위입니다. 원문을 검토해서 수정 제안을 한다는 것은 꽤나 시간을 잡아먹는 것이고, 그만큼 번역을 하지 못하니 결과물은 늦어집니다. 원문을 수정해야하는 이유를 설득하는 것 또한 에너지가 많이 듭니다. 논리를 따지며 원문 윤문을 하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번역가의 역할 범위에서 벗어난 월권행위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기업에서 프리랜서에게 번역 용역을 맡겨서 받는 번역물의 퀄리티가 매우 뛰어난 경우는 아직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원문에 대해 원작자와 제대로 소통하지 않고 그냥 있는그대로 번역하다보니 영어까지 꼬여버린 경우가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프리랜서에게 시간은 곧 돈입니다. 번역 퀄리티가 더 훌륭하다고 인센티브를 받지 않습니다. 시간 당 작업할 수 있는 글자의 수가 곧 수입과 직결되어 있고, 조금 더 퀄리티가 훌륭하다는 것을 인정해줄 사람도 없습니다.


원어민 성우도 녹음실에서 녹음 들어가기 전이 원고 검토까지 하다보면 녹음 시간이 늘어나고, 그러다 보면 녹음실 예약 시간 내에 녹음을 못 마칠 수도 있습니다. 성우도 계약한 시간 단위로 보수를 받기에 고용주 측에 문법 오류까지 찾고 알려주는 것은 불필요한 노동이었을 것입니다. 10여 년 전에 만난 그 성우도 그저 고용주가 본인에게 기대하는 역할만 충실히 하자는 생각으로 일했을 뿐이었습니다.






Garbage in, garbage out (GIGO) 라는 말이 있습니다.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온다'는 뜻으로 정보 처리 컴퓨터에 쓰레기 같은 데이터를 입력하면 쓰레기 같은 결과가 출력된다는 뜻입니다. 전제에 결함이 있다면 분석에도 오류가 생긴다는 인데,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문이 쓰레기면 반드시 쓰레기 같은 번역이 나옵니다. 


사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원문을 반짝반짝 닦으면 번역도 반짝반짝 해집니다. 지식을 파는 회사일수록 고객에게 보여지는 모든 텍스트는 회사의 얼굴이고, 가능한 한 모든 상황에서 반짝이는 얼굴로 나야 합니다. 국내 시장을 넘어 전세계에 퍼져있는 고객들에게 얼굴을 내밀고 싶다면 영어 텍스트 또한 반짝반짝해야 합니다.


번역을 하기 전 저는 가능한 한 원문을 여러 차례 읽어보고 원문 작성자에게 질문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원문을 개선할 수 있는 제안을 많이 던집니다. 제가 하는 모든 제안이 항상 정답은 아니지만, 원문 작성자의 입장에서는 질문을 받으면 원문을 새로운 시각에서 한번 더 검토해볼 기회가 생기기 때문에, 번역가와의  활발한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원문은 아주 조금이라도 더 아름다워집니다.


사실 번역가만큼 원문을 꼼꼼하게 곱씹어서 읽어보는 사람도 또 없고, 원문에 있는 내용을 열심히 리서치해보는 사람도 없습니다. 번역가와 함께 원문을 개선한 후에 번역을 시작하면 번역물은 반드시 더 나아집니다.






여기서 한번 더 고민스러운 지점이 생깁니다. 더 나은 번역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여 원문 리뷰를 하고 작성자와 대화를 통해 원문을 개선하여 번역물의 품질 또한 개선되었는데, 문제는 이러한 정성과 품질 개선 사항을 확인하고 인정해줄 사람이나 프로세스가 있는 곳이 많지 않다는 겁니다. 번역 작업에 시간은 더 들었는데 그만큼 품질이 더 나아졌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간만 오래 걸리고 아웃풋이 적은 번역사로 낙인찍힐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나도 컴퓨터처럼 쓰레기 원문은 쓰레기로 번역해도 되는 걸까요.






이 문제는 일에 대한 태도가 달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떤 작은 일을 하더라도 반드시 큰 목표를 바라봐야한다고 믿습니다. 번역은 어떠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의 일부이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작업 전체가 모두 번역 작업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 의식을 고용주, 원문 작성자, 그리고 번역가 외 모든 이해관계자가 공유하며 일할 때 최상의 번역물이 나옵니다. 

   

어떤 자료 번역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해외 투자 유치라면, 제 번역이 해외 투자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투자 유치에 성공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논리가 탄탄하고 표현도 정확해야겠죠. 이렇게 생각하면 번역가가 원문에 대한 고민도 끊임없이 함께 하는 것이 전혀 불필요한 노동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 번역을 통해 투자 설명회를 잘 마치고 해외 투자 유치를 성공적으로 이뤄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진정으로 일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목표 의식이 배제된 채 오로지 기능으로서의 번역만 하면 인정 받기도 어렵고, 오랫동안 일하기도 어렵습니다.


아니 그냥 번역만 하면 되지 왜 이렇게 질문이 많고 딴지를 많이 걸어? 참 골치 아픈 번역가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문득 10 여년 전 만났던 그 원어민 성우는 일의 기쁨을 느끼지 못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오래오래 번역이라는 일의 기쁨을 누리고 싶기에 오늘도 골치 아픈 번역가로 일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통번역업의 본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