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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nn Oct 01. 2016

16. 태국 농장, 규칙이 없는 것이 곧 규칙

노마드의 커뮤니티 탐방기: 생각

오로빌에서도, 베트남 농장에서도 항상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못한 것이 있었다. 찾고 있었지만 찾지 못한 것이 있었다. 어딘가에 적혀있지 않을까 들쳐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들은 워낙 공동체가 크니까 차마 못 물어봤다.


여기 공동체의 규칙은 무엇인가요.

이제 이 태국 농장 Sahainan은 규모가 매우 작고 (1-20명), 신생이니까 (이제 막 1년?) 당연히 규칙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여기저기 둘러봤다. 없었다. 뭐 첫날이니까 그려려니 했다, 그다음 날 아침을 먹으러 갔다. 일찍 일어난 누군가가 이미 준비를 거의 다 해두었다. 미안한 마음에 설거지를 하면서 물어봤다. 여긴 음식 담당을 어떻게 정해? 이번에 늦게 일어나서 미안해, 다음엔 내가 할게. 설거지 담당이 혹시 따로 있니? 다들 나를 외계인 보는 듯이 슬쩍 쳐다본 후에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세팅이 뙇! 우왕


여긴 그런 거 없어.

음... 뭔가 이해를 못한 건가? 재차 물어봤다. 그럼 점심은 언제 먹어? 저녁은? 시간표는 없나? 소등은 언제 해? 가든에 물 주는 것은 누가 정해?


시간표 같은 거 없어. 그때그때 정하는 거야.


뭐지.. 너무 후리 한 거 아닌가. 약간 못마땅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작긴 하지만 그래도 10여 명이 같이 사는 공동체인데 누가 음식을 하고, 설거지하고 이런 거는 대략 요일별로 순서를 정해야 하는 거 아님? 분명히 free-rider 그니까 남들이 해주는 밥만 낼롬낼롬 먹는 사람이 나타날 거야!


기회를 잡아서, 농장을 시작한 Sandot에게 물어봤다. 아니 정말 여긴 음식 담당도 없고, 농사 담당도 없냐, 그냥 진짜 시간표도 없고 그런 거냐. 뭐 대략적인 흐름은 있지만 딱 정해진 규칙은 없다. 대신 이게 있지. 하면서 대나무에 파란색 페이트로 쓴 내용을 보여줬다. We have no rules, but We have principles.


Care for the Earth
Share for the People
Fair Share



이것은 permacultre principles


뭔가 적힌 시간표와 규칙을 찾던 내가 무지몽매한 중생이 된 듯한 느낌이 들면서 다른 이들이 다들 해탈한 승려로 보였다. (...) 저 뭔가 둥둥 떠다니는 말들 말고, 6시 기상, 9시 취침 같은 시간표와 규칙이 있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이지 없었다.


궁금했다. 인위적인 규칙 없이도, 우리는 자율적으로 같이 잘 살 수 있을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돌아가면서 요리를 했고, 이번엔 네가 설거지했으니까 내가 할게 하면서 청소도 돌아가면서 했다. 알아서 아침 6시-7시가 되면 사람들은 모였고, 아침식사를 담당했던 친구는 저녁에 쉴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중간에 잠시 Sandot이 다른 동네를 가야 해서 농장을 2-3일 비워야 했다. 그때 임시 반장을 뽑아서, 그 친구가 아침 식사 후에 각자 해야 할 일을 조율해줬다. 잠시 야 우리 그냥 놀자!라고 외치면서 낄낄 거렸으나, 어차피 할 것도 없어서, (...) 바나나 심고 콩을 심으면서 놀았다.



고저 일하는 것이 잼있으니께


처음엔 참 의아했다. 당연히 식사 당번을 뽑아야 해고, 설거지 당번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표가 어딘가에 적혀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우리 서로를 믿으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규칙이 없으니, 우리는 더 창의적이고 유연하게 변했다.

비가 많이 오고, 해가 안 나서 다들 우울해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때는 아침식사 후에 각자 이야기를 해서 자유시간을 보냈다. 마을에 다녀올 사람은 다녀오고, 자고 싶은 사람은 자게 내버려뒀다. 그랬더니 다들 마을로 사라져 버려서 농장에는 2명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해가 돌아오고 마을에서 실컷 인터넷을 했더니 저절로 농장 생각이 나서, 다들 알아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니 현명한 선택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농장에 다들 남아있어야 해!라고 강요했으면 더욱 힘들지 않았을까?


밥을 다 먹고 나서, 바로 설거지를 하지 않고 빈둥거리면서 수다를 떨기도 했다. 어느 날은 모두들 늦잠을 자서 아침 식사를 뒤늦게 9시 되어서야 했다. 그럴 때 나는 잠시 짜증이 나고 아니 왜 쟤는 맨날 아침마다 처자는 거야, 좀 눈치껏 알아서 할 것이지! 이런 마음이 올라왔지만, 그건 그때뿐. 생각해보니, 뭐 늦게 먹을 수 있는 것이고, 설거지를 늦게 해서 그릇이 말라붙을 수도 있지만, 그게 큰 대수인가?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여유를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SAHAINAN 농장 :D


모든 농장이 이러한 것은 아니다. 시간표가 크게 붙여져 있는 곳도 있고, 암묵적인 규칙에 어긋나게 행동하면 크게 눈치를 주는 공동체들도 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처음 온 사람은 주눅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선 그걸 걷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만큼 우리가 서로를 믿겠다는 것. 우리에 대한 Sandot의 믿음 (혹은 귀찮음? ㅋㅋㅋ) 이 난 너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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