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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립소 Oct 11. 2022

오래 두고 보길 바라

5박 6일 제주에서

없는 폐쇄공포증도 유발할 것 같은 골드 스텔라호 캡슐 칸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산소가 부족한 것 같고 매트리스도 꿉꿉한 느낌에 잠자기는 글렀다며 한숨을 쉬었지만 육체의 피곤함은 정신의 박약증을 이겨냈다. 네 시간 정도 의식을 잃고 잠든 것 같다. 눈을 뜨니 아침 일곱 시, 제주 입항시간에 임박하였다. 여수에서 처럼 제주 역시 먹구름을 잔뜩 머금고 있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안도 잠시, 택시 승강장에 도달하자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그나마 승강장 대기선에 설치된 지붕 덕에 피할 수 있었다. 항구에 도착한 건 아침 여덟 시가 조금 지난 시간. 악천후에도 몇 명의 택시 기사님들이 여객 선착장 주변에서 감사하게도(!) 호객행위를 해주시어 한대 잡아타고 예약해 둔 숙소로 향했다. 체크인은 오후 한 시부터 가능했지만 여수에서부터 씻지 못한 채 오전 시간을 버티는 건 어렵다는 판단에, 숙소 앞 프랜차이즈 카페에 앉아 호스트에게 사전 체크인이 가능한지 호소의 메시지를 보냈다. 입실 치고 너무 이른 시간이라 반신반의 한 심정으로 보낸 메시지였는데 마침 청소를 마친 호실이 있다며 무려 다섯 시간이나 빠른 입실을 허가해주었다. 예상치 못한 친절에 왠지 제주에서의 여행은 잘 풀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메시지로 전달받은 호실과 비밀번호로 첩보작전 같았던 ‘언택트 체크인’을 실현했고 작지만 야무진 숙소를 빠르게 훑어본 뒤 지리산 때부터 밀린 빨래 먼저 돌렸다. 


숙소는 둘이 지내기에 다소 비좁은 듯한 원룸이었지만, 남쪽으로 통창이 있어 시내 건물에 가려져도 한라산 일부분을 바라볼 수 있는 뷰가 맘에 들었다. 이후 5박 동안 머무르는 아침마다 이 남쪽 통창을 통해 날씨 체크하는 재미로 일어났다.

제주 도착한 날에는 KT영업소에 들러 유심카드의 전화 충전 오류를 해결하고 마트에 들러 간단한 장을 본 뒤 내내 숙소에서 쉬었다. 하루 종일 비도 많이 왔고 여수에서부터 누적된 피로로 쉬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비 오는 첫날은, 나흘간의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제주 여행 일정을 짜는 건 집중과 선택의 집결체다. 가야 할 곳은 정말 많지만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 일주일을 채 머물지 못할 관광객에게는 제주는 너무나 광활한 지역이다. 평소에는 만나지 못할 제주만의 경관을 둘러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긴 했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제주의 독자적인 작은 가게들도 궁금했다. 몇 년 동안 한국을 들르지 못해 요즘 유행하는 것들을 직접 보며 해소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다이어리 한쪽에 브이로그나 SNS에서 눈여겨본 예쁜 장소들을 빼곡히 적어왔지만 지도에서 펼쳐보고는 이내 마음을 접었다. ‘굳이 이런 곳에?’라고 물음표 가득 한 장소에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가게들을 이어보니 영 동선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하루를 핫플레이스에 할애한다 하더라도 원하는 곳은 다 돌아보지 못할 것 같아 과감히 포기했다. 핸드폰 화면의 지도 앱을 펼쳐가며 파트너와 여행 일정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결과 이번 제주행은 숙소인 제주 시내를 거점으로 북서지역을 돌아보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제주의 바다


본격적인 여행의 첫날. 아침 일찍 202번 간선버스를 타고 곽지해변으로 향했다. 며칠간의 악천후를 보상받듯 날씨는 완벽할 정도로 화창했다. 해안가를 곁에 두고 달리는 내내 차창 너머로 바라보는 해변 위로 반사된 햇살 너울이 자꾸 눈을 간지럽혔다. 넋 놓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 곽지 해수욕장 입구라는 승하차 안내 방송을 듣고 맘이 급해졌다. 간선버스의 입출구는 버스 머리 쪽 하나뿐이라, 정차 전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불안한 걸음으로 내릴 채비를 해야 했다. 하차 후 조금만 걸어가면 순식간에 바다에 도달한다. 넓은 수평선의 끝을 찾아 둘러보고는 들뜬 마음으로 해변으로 내려갔다. 인자한 얼굴을 새겨 넣은 해녀상을 버팀목 삼아 한 손으로 양말을 훌렁 벗어던지고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퉁퉁한 발을 머금은 바다는 놀라울 정도로 투명했다. 해초 한 자락 조차도 밀려오지 않는 깨끗함이었다. 

해안선을 따라 파도가 밀려오는 모래사장을 걷다 보면 푹신하고 부드러운 만큼 고운 모래에 푹푹 빠지는 발은 나도 모르게 무거워진다. 뻐근해오는 다리를 핑계 삼아 햇볕에 바싹 마른 현무암 바위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나니 바닷소리가 온몸을 휘감았다. 바람과 함께 찰싹거리는 파도 소리는 기분 좋게 귀를 간지럽혔다.


제주는 상상 그대로의 바다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화산섬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하늘색을 그대로 투영하는 한 없이 맑은 바다, 새하얀 모래사장과 대비된 새까만 현무암 바위들. 그 검은 바위 사이를 뚫고 초록 이불처럼 덮은 제주만의 자생식물들도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여름 햇살을 그대로 받아 키 낮은 식물들도 바다 못지않게 푸르게 반짝이고 갯강구들은 인간들의 걸음을 피해 가며 재빠르게 바위틈을 향해 달린다. 곽지해변에서 애월읍의 한담 해변까지 이어지는 산책로를 걷는 내내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성가심을 잊은 휴가자의 마음이라 제주바다가 더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이튿날 일기예보상에는 이번 주 최고 무더위라 하여 만장굴로 피서를 가기로 했다. 하지만 만장굴만 방문하기에 멋진 하늘이 아깝기도 하고 아직 가보지 못한 다른 면의 제주바다도 보고 싶어 가는 길에 김녕해수욕장에 들렸다. 김녕의 해변가는 소박한 매력까지 포함한 다른 매력의 제주바다를 선사해 주었다. 

걸으며 나는 "햇살도 이토록 따뜻하다니"라고 생각했지만, 파트너에겐 너무 뜨거웠었나 보다. 그는 전날 뒷목은 생각지 못하고 선크림 바르는 걸 지나쳤는데, 하루가 지나서야 열상이 오르는 바람에 고작 한 시간 정도 산책하고 말았다. 출발 전에 찾아 둔 그 동네 식당으로 향해, 후다닥 전복뚝배기와 보말 미역국을 곁들여 먹고 택시를 타고 만장굴로 피신하였다.

셋째 날엔 비 소식이 있는 토요일이었다. 날씨도 그렇고 조금 더 많은 관광지를 즐기고 싶어 차량투어를 예약했다. 운전 겸 가이드가 될 담당자에게 우리는 서쪽의 제주를 돌고 싶다고 얘기했고, 대정면의 송악산부터 시작, 수월봉 전망대와 판포포구를 거쳐 협재 해수욕장에서 석양을 관람하며 하루를 마무리 짓는 것으로 그와 코스를 협의했다. 언제 또 만날지 모를 제주 바다를 원 없이 보겠다는 내 의지가 온전히 반영되었다.


며칠 만에 만난 고온다습한 무더위에도 땀 흠뻑 흘려가며 송악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용암에서 태어나 바람에 마모된 오묘한 지질층을 눈에 담고, 수월봉 전망대를 지날 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계획대로 차근히 이동했다. 하지만 판포포구를 보고서야 잠시 잊고 있던 성수기 마지막 주말이라는 시간관념을 상기시키게 되었다. 가두리 양식장에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생선 떼처럼 돌 난간에 서서 좁은 바다풀로 첨벙첨벙 뛰어드는 인파를 보고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분명 판포 포구는 여행 유튜버, 블로거들이 아직 외지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지역 주민들이 이용하는 해수 풀장이라고 했는데 너무나 핫한 물놀이 장소였다. 인터넷에 알려지기 시작하면 그때는 이미 뜨겁다 못해 근처에만 가도 데일 듯한 관광지가 되는 것임을 간파하지 못한 내 불찰이다. 어떤 주식 유망주가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면 이미 단물 빠진 지 오래라는 고전 농담도 있는데 말이다.


 그때부터 휴가로서 적막함은 깨져버렸다. 판포포구 길목에 즐비하게 주차된 차량과 그곳을 나서는 길목에 약속이나 한 듯 만난 차량정체에 꿈에서 깬 듯 정신이 퍼뜩 났다. 다음 코스인 금능 해수욕장 입구에 도달했을 땐 단 몇 미터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지경이라 가이드 분께는 주차하시고 쉬고 계시라 하고 우리끼리만 해안가를 산책하고 오겠노라 했다. 


금능과 협재의 해안 산책길까지 꽉 찬 인파로 혼을 쏙 빼놓았지만, 군데군데 돌부리가 날카로워 해수욕 금지 지역도 있었기에 혼잡함을 피해 간간히 쉬어갈 수 있었다. 쨍한 날에 비해 바다는 좀 덜 파랬지만 엄청난 사람들을 안고도 여전히 맑아 안쓰럽기까지 했다. 파도소리는 물놀이에 신난 아이들 함성에 묻혔고, 그 너머로 들리는 자동차 클락션 소음은 공간감을 자꾸 헤쳤다.


쉬지 않고 메아리처럼 울리는 클락션 소리에 괜스레 제주를 채우고 있는 렌터카들이 신경 쓰였다. 뚜벅이 여행객이었기에 교통혼잡이 성가실 정도는 아니었지만, 문득 생각해보니 숙소 앞 작은 골목은 호텔과 카지노가 몰려 도심 이동차량과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차량으로 나흘 내내 꽉 막혀있었다. 제주에 얼마나 많은 차가 있을까 궁금하여 웹서핑을 해봤는데, 제주 가구당 자동차 등록대수가 1.3대로 (2021년 9월 기준) 전국 최고라는 통계 기사를 찾았다. 거기에 셈하기 애매한 육지 관광객들의 탁송 차량들까지 포함하면 얼마나 많은 차량들이 섬에 묶여 있는 것인가. 대한민국 최고 크기의 방대한 섬, 긴 일정의 여행이 쉽지 않은 우리의 휴가 현실로선 차량 이동이 최선이긴 하겠지만, 다른 지역보다 급속히 늘어간다는 자동차수를 아름다운 제주가 얼마나 버텨낼지 걱정되었다. 바다 밖에서 바라보는 내 눈에는 여전히 예쁘고 맑아도 바닷속을 들여다보는 해녀들은 티브이에 나와 소리 높여 황폐화된 바다를 말한다. 한해 한해 다른 제주 바다는 죽어가고 있다며 말이다. 


자연을 훼손하는 건 다른 문명의 산물들이 더 할지도 모르고 자동차에게 죄의식을 전가하는 잠깐의 내 생각은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인간을 이동시키는 모든 동력은 환경에 반하는 일이니 말이다. 제주 땅을 밟느라 여객선을 타고, 비행기를 타고 온 나는 얼마나 많은 존재들을 짓이기고 움직인 걸까.

그렇다고 유럽의 여러 섬들이 실행하고 있는 전기차 의무화 혹은 권고 정책이 해결해줄 수 있을까? 배기가스를 덜 배출한다 뿐이지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가동되어야만 하는 에너지원과 몇 년 후 수명이 끝나는 거대한 전기 자동차의 배터리는 재활용이나 재전환될 수 있는 것일까? 뒤숭숭한 마음을 치유해 준 푸른 제주바다를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고 내가 할 수 있을 사소한 실천이라도 헤아려본다.

협재 해수욕장에서 만난 거친 현무암석 곶에 발길을 올려보니 수많은 돌탑이 세워져 있었다. 몇 없는 사람들이 돌탑 사이를 종종거리며 걷고 있었다. 누군가의 염원을 무너뜨릴까 조심스러운 사람들의 걸음이 사랑스러웠다. 뜻 모를 타인의 바람까지 조심하는 그들은 작은 풀뿌리 하나도 소중히 여길 사람들이다. 아직 인류의 상냥함을 믿는다. 작은 돌멩이 하나를 골라 어느 염원 위에 내 작은 바람도 담아 살짝 포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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