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따뜻했던 마음과 사랑
그는 백인으로 가득 찬 교회의 성가대 속의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도 내쪽을 바라보더니 잠시 눈을 빛내고 미소 지었다. 그 순간이 빈센트 할아버지를 처음 본 날이었다.
캐나다 교회에 간 건 우리가 울프빌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날 예배가 끝나고 벽 쪽에서 지노랑 나를 기다리느라 가만히 서 있던 엄마에게 제일 처음 말을 걸어준 사람이 바로 진 할머니였다. 엄마는 어색하게 웃다가. "I no speak English"를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구글 번역기를 켰다. 둘은 번역기로 대화를 나누고 나서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저분 진이라는 분인데, 밸런타인데이에 자기 집에 초대한대."
진 할머니는 나에게 와서 자기를 소개했고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고 나서 주소를 받았지만 약간 의구심이 들었다. 그 이후 교회와 카페에서 3번쯤 만나고 할머니 댁에 가는 것이긴 했지만 뼛속까지 한국인이고 도시에서 살던 나에게는 낯선 우리를 대뜸 집에 초대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분은 우리가 누군지 알고 왜 이렇게 초대를 하지? 우리가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혹시 무슨 범죄인가 라는 이상한 생각조차 들었었다. 그래도 세 명이 다 가니까 괜찮겠지?라는 마음으로 향했다. 마을 외곽 쪽으로 빠져나가서 비포장 도로를 조금 가다 보면 초원과 큰 정원이 함께 있던 하얀 집. 그게 진 할머니의 집이었다.
진 할머니는 꽃을 들고 간 우리를 향해 환하게 웃으시면서 지노에게 "학교 다녀와서 배고프지? 우리 딸들도 학교만 다녀오면 배고프다고 성화였단다."라는 말을 건네며 갓 튀긴 팝콘이 가득 담긴 그릇을 건네주었다. 지노는 팝콘을 먹었고 할머니가 꺼내준 손자들이 갖고 논다는 장난감을 보고 무장해제 당했다. 버젓이 한국 할머니가 눈을 뜨고 옆에 있었지만 진 할머니를 만난 지 30분도 안돼서 "Grandma!!"(할머니!) 하며 불렀다. 할머니가 직접 구운 쿠키와 차를 마시며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다. 아니, 시작하려 했다. 그런지 얼마 안돼서 빈센트 할아버지가 오셨다. 교회의 단상에서 본 동양인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스쿼시를 치고 오셨다고 하시면서 소파에 같이 앉아서 우리와 대화를 함께 했다.
한참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이 분들은 정말 [우리가 궁금하고 같이 잘 지내고 싶어서] 불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들의 생각 궁금해져서 물었다.
"이런 질문 무례할지도 모르지만 너무 궁금해서요. 저희는 낯선 사람이잖아요. 더군다나 외국인이고요. 왜 낯선 저희를 집에 초대해 주시고 이렇게 잘해주세요?"
그 질문에 진 할머니는 웃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잖아. 난 캐나다에 이렇게 다른 나라 사람들이 공부하러 일하러 우리나라에서 와준 게 너무 좋아. 네가 이 세상의 수많은 나라 중에 캐나다에 왔고 거기에서 울프빌에 온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그들을 대접하라고 보내준 거라 생각해. 이렇게 나는 너를 만나서 기쁘고, 너와 대화를 나누고 알아가는 게 기뻐. 내가 예전에 호주에 산 적이 있었거든. 거기도 영어를 쓰지만 가서 정말 힘들었다. 마트가도 뭐가 뭔지 모르겠고 시스템도 다르고 거리도 낯설었지. 너희도 이제 캐나다에 온 지 며칠 안되었으니 내가 그때 그렇듯이 그럴 거라 생각했어. 특히 너희 어머니는 영어를 못하시니 얼마나 힘드시겠어. 그래서 난 너희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싶어. 너희가 이곳에 와서, 나를 만날 기회가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해."
옆에 있던 빈센트 할아버지도 이야기하셨다.
"나는 홍콩에서 태어나서 1960년쯤 처음으로 이 울프빌 아카디아 대학에 와서 공부를 하게 되었어. 당시에 침례교회가 세운 학교라서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돈이 많이 없어서 딱 1년 학비만 가지고 올 수 있었어. 체류 비용도 거의 없었고 말이야. 그런데 마을 사람들, 대학교 사람들, 친구들이 도와주어서 학교를 잘 마칠 수 있었단다. 그리고 아카디아 대학에서 교수로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지. 나는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한단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캐나다에 오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싶어. 내가 받은 사랑만큼 그만큼 돌려주고 싶어서 말이야."
할아버지의 소개로 우리는 울프빌 교회 성가대에 들어갔다. 사실 나는 코로나 기간부터 교회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몇 년 만에 교회에 다니는 것이었다. 어색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빈센트 할아버지는 10여 명이 되는 성가대 대원들에게 나랑 엄마를 소개해줬고 우리는 부활절 칸타타부터 함께 준비를 했다. 주중에 하루 교회에 가서 성가대 연습을 할 때마다 빈센트 할아버지는 우리를 보며 항상 환하게 웃어주셨다. 빈센트 할아버지를 유독 좋아하던 지노는 매번 할아버지에게 안기면서 "빈센트!" 하며 외쳤다.
"빈센트라고 지노가 부르는데 좀 예의 없게 느껴지지 않나요? Mr. Leung이라고 불러드리는 게 나을까요?"
그 말에 빈센트 할아버지는 웃으셨다.
"나도 홍콩에서 왔기 때문에 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하지만 우리는 캐나다에 있고, 우리는 친구잖아. 친구끼리는 이름을 부르자. 지노야, 걱정 말고 항상 나를 빈센트라고 불러다오"
"네! 빈센트!"
지노는 다시 할아버지에게 안겼다.
캐나다에서 봄이 오기 전까지 지노는 자주 아팠다. 3월에 아팠을 땐 40도에 육박하는 고열에 숨쉬기조차 힘들어했다. 우리에겐 학교보험이 있어서 병원에 갈 순 있었지만, 그 동네 자체가 병원에 대한 인프라가 좋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이 약을 먹이고 몸은 미온수로만 닦아주는데, 빈센트 할아버지가 연락이 오셨다. 전날 우리가 지노가 아파서 교회에 못 간다고 하자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셨었는데, 계속 더 아프다고 하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스, 지노는 좀 어때? 병원에 가야겠으면 내가 켄트빌에 있는 큰 병원에 있는 응급실에 같이 가줄게. 말해줘."
이 문자를 보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할아버지는 전화도 하셔서 "지금 도움이 필요한 게 없어? 영어가 걱정이면 내가 같이 가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가면 돼." 라며 지노의 건강을 같이 걱정해 줬다. 이때부터였을까 빈센트 할아버지가 정말 캐나다에 같이 사는 내 아버지 같이 느껴졌다.
엄마는 캐나다에 가서 영어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서 에너지를 받는 엄마는 대화를 나눌 사람이 제한적인 이 상황에서 바보가 된 것만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다른 대도시나 1시간쯤 가면 있는 핼리팩스에는 도서관등에서 영어수업을 열어준다지만 이 동네에는 그런 곳이 하나도 없었다. 온라인 수업을 몇 번 받던 엄마는 이게 너무 안 맞는다면서 그만두었고 할아버지께 그 이야기를 했더니 빈센트 할아버지는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그럼 교회에 영어교실을 열어볼까?"
"진짜요? 그럼 너무 좋죠."
"혹시 주변에 영어공부를 같이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 줄래?"
"그럼요.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모인 할아버지의 영어수업은 그때부터 꾸준히 이루어졌다. 멤버들은 중간중간 바뀌었지만 엄마와 내랑 친한 언니였던 미언니는 꾸준히 함께 했다. 처음엔 알파벨 소리부터 시작해서 중간엔 헬렌켈러 영어책 읽기도 하고 영어 역할극도 진행하셨다. 엄마가 성가대 악보를 읽는 것도 도와주셨다. 할아버지가 일정이 있는 날엔 주변 사람들도 번갈아가면서 수업을 이어나갔다. 이 모임을 통해 엄마의 영어실력이 일취월장하여 1년 만에 프리토킹이 되었다고 할 순 없지만 엄마의 캐나다 적응에 큰 도움이 된 건 사실이었다. 엄마는 주 2회씩 있는 영어 수업, 성가대 연습, 봉사 일정 등으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갔고 우울했던 마음이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사라졌다.
4월쯤이 되자 캐나다에 바야흐로 봄이 찾아왔다. 진할머니가 "우리 같이 밭을 가꾸자!"라고 하셔서 지노는 마켓에서 콩 씨앗을 사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씨앗을 심고 가꾸었다. 여름쯤엔 근사한 밭이 되었다. 지노는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들를 때마다 조금씩 잡초를 뽑았다. 함께 가꾼 정원이라는 생각에 그 정원을 갈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여름엔 함께 카누를 탔다.
할아버지는 카누 강사 자격증이 있으신 분이라 매년 카누를 타신다고 하셨는데, 예전에 대학교수 시절엔 나 같은 유학생들을 데리고 카누를 자주 가르쳐주셨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다양한 노 젓는 법을 가르쳐주셨는데, 그중 기본이라는 J 스트로크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아무리 해도 할아버지처럼 노를 저을 수 없어서 "우리 조만간 카누 다시 타러 와요! 그다음엔 꼭 제대로 할게요!"라고 말했다.
가을쯤 되자 할아버지 집 마당엔 호두가 주렁주렁 열렸다. 난 호두가 그렇게 열리는걸 처음 보았다.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이 집에 이사 왔을 때 심었다는 호두나무는 매우 컸고 워낙 많이 열려서 까서 먹기 힘들다고까지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틈나는 대로 할아버지 집에 방문해서 호두를 깠다. 호두 병을 가득 채워서 할아버지네 냉장고에 넣어두면 할아버지는 어느새 저 병을 우리 가방에 넣어두었다.
"나는 많이 있으니 지노랑 같이 많이 먹어. 호두는 아이들한테 참 좋다더라."는 할아버지가 항상 하시던 말씀이셨다. 나는 그때마다 "다음에 와서 제가 더 많이 깔거에요. 다 까버리시면 안돼요!" 라고 말하곤 했다.
크리스마스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가족 식사자리에 우리 가족과 다른 유학생들을 초대해 주셨다. 작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가서 뜨겁게 포옹하고 크리스마스 음식을 함께 했다. 이땐 이미 한 가족이었다. 함께 손을 잡고 나눈 기도와 낮게 흐르는 캐럴, 그리고 맛있는 음식까지 이게 진짜 크리스마스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갔던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보드게임을 하고 땅콩을 까먹으면서 우리는 정말 많이 웃었다. 지노는 할아버지 옆에 바짝 붙어서 말을 걸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할아버지에게 장난을 쳤다. 어느덧 9시가 다 되었을 무렵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스, 우리 내년에도 이렇게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면 좋겠구나. 오늘 정말 너무 좋았어."
"저도요. 저도 그래요."
난 그날 완벽한 크리스마스를 경험했다.
나도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사실 빈센트 할아버지는 혈액암을 앓고 계셨다.
너무나 고령이라 적극적인 치료는 어려워서 지금의 삶을 유지하는 쪽으로 평안하게 사는 쪽으로 진료 방향을 잡고 치료하고 계시다고 했다. 1년 사이 할아버지의 손과 팔은 점점 까맣게 변해갔다. 작은 상처가 생기면 잘 낫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셨고 손끝에 밴드를 달고 사셨다. 간혹 몸이 힘드셔서 영어 수업을 못할 때면 무척 미안해하셨다.
2월 첫 주에 교회에서 성찬식을 했다.
교회에서 장로 역할을 하던 할아버지가 성가대 쪽으로 빵과 음료를 든 접시를 갖고 왔을 때 나는 하나를 집어 들고 할아버지께 작은 목소리로 "Thank you"라고 말했고 할아버지는 미소 지었다. 난 그날 예배 후에 "빈센트, 오늘 기도는 감동적이었어요. 오늘 뭐 하세요?"라고 물었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다. 얼마 남지 않은 캐나다 일정을 꽉꽉 채우려고 친구들하고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빵을 받을 때 나눈 우리의 눈길, 그게 할아버지와 나의 마지막 눈 마주침이었다.
그 주 토요일 저녁 진 할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연락이 왔다.
"빈센트가 중환자실에 있어. 패혈증으로 팔을 절단했어. 의식은 없지만 아마 너희 가족을 보고 싶어 할 거야. 병원에 와 줄 수 있겠니?"
무슨 정신으로 병원에 갔는지 모르겠다. 중환자실 앞에 가서 면회신청을 하고 우리 가족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앉아있다가 간호사의 부름에 중환자실 한쪽으로 갔다. 몇 주전 함께 보드게임을 하고 웃고 함께 식사를 하고 고작 며칠 전 교회에서 나에게 빵과 음료를 나눠준 할아버지는 퉁퉁 부은 얼굴로 각종 기계에 연결되어 누워계셨다. 한쪽 팔이 있어야 할 부분에 이불이 푹 꺼져 있었다.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멈출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의식이 없는 사람의 마지막은 청력이라고 했지. 나는 할어버지가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마스크가 축축하게 젖어갔다.
"빈센트 할아버지. 저 왔어요. 저희 진짜 많은걸 같이 했죠. 어쩜 그렇게 저희를 가족처럼 챙겨주셨나요. 전 받은 게 너무 많아요. 할아버지는 저에게 정말 캐나다의 아버지 같은 분이세요. 지금까지 할아버지에게 충분하게 사랑한다. 고맙다. 이야기하지 못해 죄송해요. 빈센트 할아버지 사랑해요. 고마워요. 정말 정말 고마워요. 지금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아요. 지금 당장이라도 할아버지가 다 회복해서 일어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고 같이 웃고 싶지만, 혹시 할아버지가 천국에 가는 게 하나님 뜻이라면,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 저는 앞으로 할아버지처럼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많이 베푸는 사람이 될 거예요. 정말 노력할게요. 할아버지 고마워요. 사랑해요.."
지노도 엄마도 함께 울었다. 엄마도 "빈센트, 너무 고마웠어요. 땡큐 빈센트, 땡큐 베리머치"를 끝없이 말했다. 우리가 간호사가 와서 이제 가야 한다고 할 때까지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 말 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다음날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캐나다의 장례식은 돌아가신 날 바로 시작하지 않는다. 화장은 미리 하지만 가족들이 모일 수 있는 시간을 생각하고 장례를 치를 수 있는 곳의 일정에 맞춰 진행한다. 우리는 2월에 한국으로 귀국할 계획이었고 귀국 전 짧은 뉴욕 여행을 예약해 두었는데, 하필 그 일정에 맞춰 장례식이 잡혔다.
돌아가시고 며칠 뒤, 장례식 일정을 확인하고 죄송한 마음을 담아 진 할머니 딸인 자네스에게 연락을 했다. 여차저차하여 장례식 참여가 어려울 거 같은데, 그전에 얼굴 한번 봐도 되냐고 물었다. 그러고 나서 날을 잡고 할머니 댁에 방문했다.
"빈센트가 의식이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뭔지 알아? 오늘 영어 수업이 있는데... 였어."
할머니 말에 다시 눈물이 났다. 번역해 준 내 말에 엄마도 눈물을 글썽였다. 할머니는 "울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울지 마. 나랑 빈센트는 암 진단을 받고 오랫동안 준비했어. 이렇게 너희 가족과 1년을 잘 보낸 거 너무 좋았어. 빈센트는 정말 마지막까지 인생을 잘 지내다 갔단다."
우리는 그날 진 할머니와 오랫동안 껴안고 그를 그리워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나는 오늘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나에게 아버지였으며, 선생님이었으며, 등대였다.
이 낯설고 험하고 어려운 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사람 중 하나였으며, 나는 1년간 그 사랑을 받기만 하고 자랐다. 내 아이가 아플 때, 수업이 힘들 때, 영어가 어려울 때, 혹은 종종 이 모든 것들이 어렵고 두려울 때, 내가 하는 푸념하는 말 한마디도 그는 놓치는 법이 없었고,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나는 그 넘치는 사랑을 받기만 하고 받기만 하여, 그 모든 감사를 고맙다. 는 가볍고 대신할 수 없는 말로 대신하곤 했다. 그리고 이젠 그 가벼운 말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2023년 우리는 그의 정원에서 꽃을 함께 보고 즐거워했고, 카누를 함께 탔고, 호두를 같이 깼으며,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나의 일기장은 그의 이름이 가득한데, 이젠 나의 일기장에 그의 이름이 적히는 게 마지막이 될 거라는 게 믿기지 않게 슬프다.
노를 젓는 게 서툰 나에게 그는 다시 노를 젓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다시 타자고 약속했었고, 나는 그의 집에 있는 호두를 다 깨주겠다고 말하곤 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서로를 향한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애통함과 비통함으로 얼굴에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나의 투박한 글솜씨와 영어로 글을 썼을 때 달라질지도 모르는 내용이 두려워 내 모국어인 한글로 글을 적는다. 아마 내가 이런 말을 직접 그에게 했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It's ok, Jess, It's ok, You are doing great." (괜찮아, 제스, 괜찮아, 넌 잘하고 있단다.)
그 말을 다시 들을 수 없다는 게 믿을 수도 없고 너무 슬프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캐나다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나는 학교에서 미국에서 온지 얼마 안된 손세라를 처음 만났다. 말도 문화도 시스템도 너무나 서툰 나라에 온 손세라를 보자 나의 모습이 생각났다. 진 할머니, 빈센트 할아버지, 우리가 이랬었는데 많이 도와주셨지요. 손세라가 무언가 잘 모르겠다고 할 때 나는 적극적으로 돕고, 아프다고 할 땐 병원에 함께 가서 통역을 해주었다. 손세라는 그로부터 얼마뒤에 나에게 이런 걸 물었다.
"그런데 너는 왜 이렇게 나에게 잘해줘?"
"아, 그건 말이야. 내가 캐나다에 있을 때 만난 분 중에 빈센트라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낯선 곳에 막 도착한 나에게 정말 많은 사랑으로 도와주셨거든. 그때 받은 게 너무 많아서 나는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한테 갚는 중이야. 난 그걸 너에게 갚을 수 있어서 기뻐."
방 한쪽에 놓인 할아버지의 장례식 팸플릿을 볼 때면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과연 할아버지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는가.
난 다시 한번 빈센트 할아버지처럼 살아가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