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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수 Aug 27. 2023

오십 보 백 보

논리의 한계


 다르다. 절대 같지 않다. 오십 보와 백 보는. 엄청난 차이다. 오히려 오십 보와 백 보의 물리적 거리 그 이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그것은 바로 백 보 도망간 자는 제일 먼저 도망친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있었기에 오십 보를 도망가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전쟁터나 데모대나 응원단 등 군중 속에 있어 본 사람은 안다. 군중심리에서 처음 움직이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뛰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은 이유도 모르고 따라가는 법이다. 더욱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판단이나 생각을 할 겨를도 없다. 이것은 사람들이 맹수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 익힌 오래된 직감일 뿐만 아니라 생명체의 DNA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본능이다. 살기 위해서는 무리 속에 있어야 한다. 고립되거나 무리에서 떨어진 외톨이는 쉬운 먹잇감이 된다. 그러기에 지도자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고 미국과 한국에서 장교교육의 모토를 ‘나를 따르라’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전우들이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그 현장의 공포와 위험을 무릅쓰고 방어선을 지키고 적진을 향해서 한 발 한 발 전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엄청난 용기와 신념과 각오가 필요하기에 고대 로마에서부터 현재 미국에서도 전장을 끝까지 지키며 전우를 구하고 적진에 처음으로 뛰어든 용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그 명예를 칭송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본능이 얼마나 비이성적인지는 이태원과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압사사고의 사례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원래 오십 보 백 보의 고사는 '맹자(孟子)·양혜왕(梁惠王) 상(上)'에 나오는 격언으로 '피장파장'이나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처럼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웃어도 자기도 같은 잘못을 하는 것에 정도의 차이만 조금 있다'라는 뜻인데 이는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명확히 가리지 않고 상대방의 흠을 들추어서 자신의 과실을 덮으려는 전형적인 '물타기'수법이며 잘못을 저지른 자의 반성 없는 비겁한 변명에 불과한 궤변이다. 양비론은 정의가 아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그러니 누구도 다른 사람을 단죄할 자격이 없다. 죄가 없는 자만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칠 수 있다.'는 종교적인 멋진 말도 같은 맥락에서 악용될 소지가 있다.

  그리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과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라.'는 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먹는다.'와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잡아 먹힌다.'

                 '잘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와 '대기만성'

  ‘알아야 면장,’ ‘모르는 게 약’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등등

 서로 대조해 보면 상반되는 모순이 왜 개별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고 설득력이 있을까? 어떻게 해서 이런 궤변들이 통하는 것일까?  답부터 말하자면 세상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들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처럼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을 보며, 사실을 무시하고 말장난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런 궤변의 뿌리는 깊다. 기원전 480년 경에 활동한 프로타고라스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언변에 뛰어난 철학자들 즉 '궤변가'('소피스트')들이 활약했고 중국에서도 춘추 전국 시대 수많은 학파(學派)들 중 名家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교묘한 궤변으로 이름을 날렸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남의 소를 훔쳐 갔다. 관가에서 그를 잡아다가 왜 남의 소를 훔쳐 갔느냐고 신문(訊問)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제가 길을 가는데, 길에 웬 쓸 만한 노끈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노끈을 주워 가지고 집으로 간 것뿐입니다. 소는 잘 모릅니다." 길에 떨어진 노끈을 주웠는데, 노끈에 소가 매어져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소를 훔치려 한 것이 아니고 소를 못 본 것뿐이니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이처럼 듣기에는 그럴듯한 궤변이 실제로 통하고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것이 현실과 괴리되어 있는 선전선동이 되어 사회의 문제점을 왜곡하고 잘못된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사태를 더 악화시킨다는 점이다.

  원래부터 세상은 그렇게 논리적이지 않다. 세상 만물의 이치는 워낙 오묘하여 인간의 이성과 논리적 사고로 다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인간의 심리는 가장 비논리적인 것의 대표주자다. 사람은 '오기'로 자신에게 불리한 선택을 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비논리적인 이유로 '사랑'이란 걸 한다. 꿀벌의 군집이나 어미의 새끼 돌봄처럼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개체가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논리적이지 않고, 엔트로피를 부분적으로 감소시키는 생명현상 자체부터가 존재론적으로는 비논리적(쉽게 말해 안 태어나고 안 살면 평안한데 왜 생명체는 힘들게 아등바등 살아가는가)이다. 아파트 값이 과열되었다가 냉각되고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 경제현상도 비이성적이며, 어떤 사람은 성실하게 사는 데 가난하고 누구는 가만히 앉아서 돈과 권력을 대대로 누리는 것도 비합리적이다.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는 광자의 움직임도 비논리적이며, 미시세계에서 동시에 다른 곳에서 확률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양자도 비논리적이고, 거시적으로 시간과 공간이 휘어진 우주공간도 인간이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모든 종교적 위안은 비논리적이며, 먹고사는데 직접 도움이 안 되는데도 이렇게 글을 쓰고 읽게 하는 우리의 쾌감과 뇌도 어떻게 보면 제정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논리만으로 세상 이치를 깨쳤다고 착각하는 데 문제가 있다.

  한국에서도 한 때 2000년을 전후하여 '논리야 놀자',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 운동권을 중심으로 논리를 배우자는 열풍이 불었고 심지어 대학 입시에도 ‘논술’이 등장하여 운동권이 사교육 학원가로 진출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정치권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논쟁과 논리로 모든 문제의 답을 찾으려는 풍조가 생겨 소위 말발이 ‘쎈’ 논객들이 인기를 얻고, 논리에 집착하고 논리에서 이긴 사람들의 주장이 정책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상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데, 이는 현장을 외면한 '탁상행정‘이 될 위험성이 다분하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현장 경험과 전문지식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논리와 사유와 이론으로 덮으려고 한 것이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실현이 불가능한 공상에 불과한 공산주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실패가 예견된 것이다. 즉 얼마 전 시장을 거스르는 이론적 규제의 남발로 실패한 부동산 정책이 대표적인 사례로, 현실을 올바로 이해하려는 이론이 아니라 현실을 공상으로 이끌어 가려는 이론이어서, 근본적으로 비논리적인 세상을 논리라는 사람의 생각만으로는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속이냐 침체냐의 기로에 서 있는 대한민국이 모처럼 얻은 호기를 놓치지 않고 더욱 발전하기 위해, 그리고 공리공론과 이기적 당파싸움에 몰두하다가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뜨리고 세상의 진보를 쫓아가지 못하여 나라마저 잃은 조선말기나 북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이상주의자들의 감상적 선동과 이론가들의 말싸움이 아니라 현장과 민생과 과학을 중시하는 實事求是가 다시 한번 정답이다.

  '말이 안 되더라도 그것이 현실이라면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모든 행복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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