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하지 않은 공감력 그리고 피아노
불쑥 찾아온 사십춘기 그리고 이른 회고 #5
열 살부터 중풍 할머니를 간병하며 속마음을 감추고 살아온 20여 년.
이유 없이 40대 중반에 뒤늦은 사춘기가 옵니다.
그래서 다시 열 살 꼬마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몇십 년이나 지났지만 어린 나를 만나, 그때 그 마음을 글로 어루만져줍니다.
<할머니는 이제 내가 키운다 : 불쑥 찾아온 사십춘기 그리고 이른 회고 #4>에 이어...
지금 생각해보면 결혼하는 그날까지 할머니와 함께 했던 20여 년이 내 삶의 근간이 되었다.
우울하지만은 않았다.
덕분에 정말 많은 경험을 "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대다수 학생들이 선행 공부를 하던 시절이 아니긴 했다.
하지만 그랬대도 난 다닐 수 없었다.
그래도 초등시절 유일하게 2~3년 다녔던 학원이 있었다.
바로 가정집에서 운영하는 피아노 학원.
같은 아파트 단지라 가깝고 1시간만 치고 오니까 할머니 간병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제한된 상황에서 오아시스같이 숨 쉬는 순간이어서 그랬을까?
매일 주어지는 그 한 시간 동안 난 혼신의 힘을 다해 피아노를 쳤다.
그 결과 2학년 때 시작한 바이엘, 그리고 4학년 말에 체르니 40번까지 마칠 수 있었다.
영문을 모르셨던 선생님은 엄마께 나의 피아노 전공을 권하셨던 것 같다.
엄마는 깔끔하게 거절하셨다.
나도 그저 내 감정을 드러내며 스트레스를 푸는 통로였기 때문에 아쉽지 않았다.
(아니면 집안 사정 걱정하는 맏이 신드롬 때문에 아무렇지 않다고 스스로 세뇌했는지도...)
5학년이 되면서 피아노를 끊었으나, 음악이 좋아 국민학교 교내 합창부에 지원했다.
그런데 체르니 40번까지 마쳤다는 이유로 학교 대표 반주자가 되었다.
나보다 더 많이, 오래 친 친구와 언니들을 제치고 내가 반주자로 뽑힌 이유가 당시 궁금했다.
아마도 '한'이 느껴지는 선율을 선생님들이 발견하신 게 아닐까.
어느 날 교감 선생님이 (죄송하지만 교가를) 변주에 가까운 반주를 하는 나에게 다가오셨다.
"00아, 다음 달에 교장 선생님이 퇴직하시는 데 우리가 노래를 만들어서 전교생이 불러드리면 어떨까?
내가 가사를 썼으니 네가 그 가사에 맞게 작곡을 해보렴."
늘 가이드가 없던 상황이었지만, 이번에도 별다른 가이드 없이 주어진 기회이자 막중한 프로젝트였다.
그래도 그렇게 믿어주시는 교감 선생님께 보답하고 싶어 가사에 어울리는 곡을 입혀 보고(?) 드렸다.
"바로 이거야! 너 정말 잘하는구나!"
교감선생님의 인정을 받다니... 누구보다도 엄마께 빨리 이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었다.
유일하게 다녔던 피아노 학원, 그게 작곡까지 연결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렇게 나와 교감 선생님의 합작품이 교장 선생님의 정년퇴직 기념 날 전교에 울려 퍼졌다.
그 뒤 특별한 작곡 활동은 없었다.
학원을 끊었어도 피아노에 대한 감을 유지하기 위해 아빠가 좋아하시는 <소녀의 기도>, <엘리제를 위하여>, <은파>, <사랑의 크리스티나>, <선구자> 등을 번갈아가며 연주했다.
알게 모르게 우리 가족 감정 정화(카타르시스)의 좋은 방법으로 나의 연주가 아주 잘 활용되었다.
강약을 제멋대로 구사하며 거침없이 연주할 때만큼은 우리 가족 모두 말없이 각자 힐링의 순간을 맛보았다.
중학교에 진학했다.
나의 룸메이트인 할머니와 한 방을 사용하며 할머니 케어는 계속되었다.
할머니 상태는 좋아지고 있었지만, 간간이 요강에 앉을 때 넘어지셨다.
그것도 꼭 새벽에...
할머니 옆에 요를 깔고 나란히 잤던 나는 부스럭 소리에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할머니의 팔다리를 주무른다.
할머니가 괜찮아지면 뒷수습을 하고 다시 잠을 청한다.
결혼하기 전까지 그랬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몇 가지 습관이 생겼다.
먼저 시종일관 웃는 것.
나와 얘기해본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너는 참 밝은 사람 같아."
이 웃는 얼굴은 할머니가 미안해하실까 봐 만든 나의 기본적인 페르소나다.
그리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니즈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버릇이 생겼다.
왜 저렇게 말할까.
왜 저런 행동을 할까.
"넌 내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아."
이 역시 할머니가 뭘 원하시는지 알아내려고 관찰하는 습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밝음과 공감력으로 늘 많은 친구들 사이에서 외롭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양날의 검이 되고 말았다.
학교에서 고민을 터놓으며 나의 의견을 묻는 친구들이 많아지며 난 상담사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 성적 혹은 또래 관계의 갈등이었다.
신기하게 이 상담도 자꾸 하니 그 실력이 붙더라.
처음엔 점쟁이나 해결사라도 된 듯 친구들의 숨은 속내를 파악하여 묘안을 주는 게 재밌었다.
그러나 내담자(?)가 많아지면서 상대적으로 내가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SerenaWong@pixabay
정작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은 없는데...
할머니를 모시며 학원조차 맘 편히 갈 수 없는 내 생활을 누구에게도 드러낸 적이 없는데...
내 상황이 너무 기막혀 누가 듣던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난 함구했다.
학교에서는 친구들을 돕고, 집에선 할머니를 돕고...
너무 힘든 날은 피아노 앞에 앉아 또 한을 담아 미친 듯이 손을 움직였다.
말도 못 하는 피아노가 그래도 내 얘기를 들어주는 것 같아 고마울 때도 있었다.
한 움큼 털어내면 난 다시 웃음으로 무장했다.
나중엔 내가 웃는 건지 아니면 내 안면근육이 그렇게 세팅된 건지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가끔은 스스로가 다중이(다중 인격체)스러워 괜히 위축되기도 했다.
그때의 나를 지금 만날 수 있다면, 움츠러들 필요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너, 너무 잘하고 있다고...
그리고 웃지 못할 상황에 그렇게 억지로 웃을 필요 없다고도.
아이처럼 화도 내고 울기도 하라고, 그래도 된다고.
상대방에게 감정을 억누르고 다 맞춰줄 필요 없다고...
그러나 그때 내 마음을 깊이 이해해주는 친구는 사람이 아닌 피아노였다.
그렇게 내 중학생 시절은 '나'를 잊은 채 깊어가고 있었다.
... <불쑥 찾아온 사십춘기 그리고 이른 회고 #6>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