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금 시간 7시의 신데렐라 여대생
불쑥 찾아온 사십춘기 그리고 이른 회고 #9
열 살부터 중풍 할머니를 간병하며 속마음을 감추고 살아온 20여 년.
이유 없이 40대 중반에 뒤늦은 사춘기가 옵니다.
그래서 다시 열 살 꼬마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몇십 년이나 지났지만 어린 나를 만나, 그때 그 마음을 글로 어루만져줍니다.
<세상은 공평한가요 : 불쑥 찾아온 사십춘기 그리고 이른 회고 #8>에 이어...
<2부. 아빠와 나>
기적 같은 시간이 펼쳐졌다.
안 그래도 고3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기쁨이었는데, 내 실력 이상으로 베팅한 대학에 소속이 생기니 그 기쁨이 두배였다.
(사실 베팅을 주도하신 담임 선생님이 제일 놀라신 것 같았다.)
대학 입학 선물도 받았다.
열 살 때부터 그렇게도 바라고 바라던 공주(그래도 20대가 되었으니 공주 캐릭터가 아니라 단지 커버가 핑크색인) 침대.
드디어 나에게도 뒤늦게 침대가 생긴 것이다!
비록 내 방이 따로 생기진 않았지만, 내 싱글 침대 옆에 할머니 요가 있어 침대에서 내려올 때 할머니를 밟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 빼고는 할머니도 나도 만족했다.
대학 입학 전 특별히 집중했던 일이 있다.
바로 강남역 구석구석 파악하기.
당시 국기원 옆에 친구들과 드나들었던 강남도서관과 주변 맛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맛집 지도를 그렸더랬다.
왜냐면 할머니 케어는 계속되었고 제한된 시간에 집중적으로 신나게 놀려면 어디 갈지 어슬렁거리는 시간을 줄여야 했기 때문이다.
맛집 놀집 실사는 졸리지도 지겹지도 않았기 때문에 빠르고 쉽고 신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드디어 입학식.
사실 OT에서 처음 소주를 마시고 과 친구들에게 큰 기억을 남겨줬기 때문에 한동안 과 활동이 창피했다.
워낙 아빠가 평소에 너무나 맛나게 드셔서 정말 맛난 줄 알았다.
선배들이 깡소주를 종이컵 가득 주시길래 넙죽넙죽 대여섯 잔 받아 원샷을 했더랬다.
빈속에 그렇게 다 받아주어라 했더니 어느 순간 땅바닥이 내 얼굴로 자꾸 덤비더라.
그 뒤의 기억은... 동기들 말이 그 뒤로도 더 마셨다던데.
그리고 나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다른 선배들과 동기들에게 못할 짓을 했다. (쉬지 않고 내 위장은 알코올을 뱉어냈다...)
알코올에게 호되게 당했지만 금방 잊고 학과에서, 동아리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회포를 풀기 시작했다.
이게 진정 자유란 말인가!
그러나 나의 자유를 속박하는 그림자가 바로 내 옆에 있음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학생의 평균 귀가 시간으로 몇 시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가?
더 정확히 여대생이라고 하자.
밤길이 위험하니 빨리 귀가해야 한다는 아빠의 말씀이 틀린 건 아니다.
그렇다면 적정 귀가 시간은 몇 시?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내부의 적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아빠는 수업 마치고 저녁 7시까지 오라고 하셨다.
늦은 수업이 있으면 8시까지로 봐주셨다.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중고등학생 때도 할머니 곁을 지켰던 이유로 아빠가 그렇게 통제하는 분인 줄 전혀 몰랐다.(독서실은 집앞이라 괜찮았나보다.)
이제 한번 제대로 놀아볼까? 하는 설레는 신입생의 마음은 매일 아빠와의 기싸움으로 병들어가고 있었다.
'아빠, 나 할머니를 위해 내 10대를 반납했는데 이제 20살이 된 나를 좀 그냥 두심 안 돼요?'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고 통금 시간은 전문 용어로 "짤 없이" 7시였다.
아직도 아빠의 엄한 기운이 생생하다.
1학년 한 때 수업의 끝은 늘 알코올을 곁들인 저녁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 수업이 5시에 끝나 여느 때처럼 우르르 학교 앞 술집으로 향했다.
집에 7시까지 가려면 늦어도 6시 정도에는 출발해야 한다.
교문에서 지하철까지 가려면 셔틀이나 버스를 타야 하니 또 시간 로스가 생긴다.
그래서 꼭 지하철역 근처에서 마셨다.
술과 안주를 시켜 빨리 나오면 5시 30분.
나에게 허락된 30분을 3시간처럼 즐기며 마셔야 했다.
OT 사건으로 인해 소주의 위력을 알긴 했지만, 그보다도 짧은 시간 내에 다 놀 수 있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이상하지만 3시간 동안 마시고 먹을 분량(당시 주량이었던 소주 반 병과 안주)을 그 30분 동안 흡입했다.
그리고 6시 즈음이 되면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한 번 반항해볼까, 그룹 숙제가 있다고 전화하고 늦게 갈까 등등 많은 아이디어들이 오갔으나 이내 포기하고 나왔다.
굳은 얼굴로 잔소리를 퍼부으실 아빠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무 지겨워 지레 포기하게 되더라.
나를 기다리는 아빠 특유의 포즈가 있다.
내가 현관으로 들어갈 때 언제나 아빠는 거실 1인용 소파에 앉아 TV를 보신다.
그리고 7시 이전 현관 문소리와 함께 나의 안전 귀가를 확인하시면 바로 방으로 들어가신다.
7시가 넘으면 폭풍 잔소리로 나는 세상 나쁜 불효녀가 되어버린다.
정말 10대 때는 몰랐던 아빠의 재발견이었다.
불만이 쌓여갔으나 아직은 무서운 아빠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7시 전에 노는 걸 마치려고 노력했다.
더불어 공강 시간마다 최선을 다해 즐기려고 했다.
공강이 짧으면 학교 내에서, 공강이 3시간만 되어도 꼭 학교 밖에서 신나게 놀다가 들어왔다.
어느 순간 공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에 수업 시간까지 침범하게 되었다.
1학년 때는 다행히 전공보다는 교양 수업이 많아 양심의 가책을 덜 받고 수업을 재꼈다.
(내가 그래서 교양이 부족한가보다.. 후회막심하다)
아니, 이게 무슨 대학생이야?!
어차피 스터디도 못하고 다들 다니는 토익 학원도 못 다니고 신데렐라처럼 7시면 땡 소리와 함께 집에 있어야 하는 내 신세..
10대 시절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만회하려고 했던 기대감에 더 불만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통금 시간이 자유로운 친구들이 제일 부러웠다.
그때 귀가 시간 때문에 아빠랑 얼마나 싸웠는지 모른다.
khfalk@pixabay
내가 습관처럼 말하는 "가성비"는 여가 시간 영역까지 뻗어나갔다.
나에게 허락된 시간 동안 가장 신나고 재밌게 노는 게 더욱 중요해져 버린 것이다.
웃프지만 고등학생 때의 짖꿎음도 함께 부활했다.
동아리 친구들 중에 아직도 친하게 지내는 남사친이 여럿 있다.
지금은 그들 모두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가진 훌륭한 리더로 성장했지만 당시에는 너나 나나 다 똑같은 학생이었다.
그중 한 명과의 에피소드다.
지방에서 처음 서울로 올라와 그저 모든 게 새로웠던 이 친구는 특히 강남역을 평정한 동아리 여학생이 신기해 보였나 보다.
맛난 걸 사 줄 테니 압구정 맛집에 가자고 제안하더라.
워낙 심성이 곧고 누가 봐도 모범생 태그를 달고 다니는 이 친구가 남동생처럼 무척 편했다.
흔쾌히 이 누나가 핫한 곳을 소개해주리라 기대 잔뜩 하게 하고 파스타 레스토랑에 데려갔더랬다.
당시 비싼 가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는 12.0 그리고 9.0이라고 가격이 적혀 있는 음식을 주문했다.
이런 표기는 사실 나도 처음이었다.
당혹스러웠으나 이내 1만 2천 원이겠지, 9천 원이겠지 생각했다.
함께 어리둥절해하는 이 친구에게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굳이 설명했다.
"12만 원, 9만 원이란 뜻이야. 압구정엔 이런 데가 많아~"
오렌지족이 좋은 차를 몰고 와서 "야, 타!"를 외치던 시절, 그들로 유명한 압구정이었다.
음식을 먹는 내내 조용했고, 다 먹을 즈음 친구 얼굴이 새파래져서 안절부절못하더라.
급기야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혹시.. 이 주변에 돈 뽑는 곳 아나? 내가 십만 원밖에 안 가져와서...우짜노? 니 돈 좀 있나.."
순진한 이 친구는 난생 처음 가 본 압구정에서 그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말았다.
지금 고급 공무원으로 열일하는 이 친구에게서 그저께도 안부 카톡이 왔다.
내가 브런치에 이 얘기 쓸 거라고 으름장을 놓자 오히려 그런 소중한 추억 만들어줘 고맙다며 옛 생각에 함께 한껏 웃었다.
제대로 깐부다.
그렇게 핫한 장소에서 놀고도 글쎄 대학생임에도 난 7시까지 집에 돌아와야 했다.
귀가 길은 언제나 뭔가 덜했다는 마음에 심통이 가득했다.
동시에 아빠에 대한 원망의 씨앗이 싹 텄다.
그리고 그 씨앗은 나의 억울함과 짜증을 거름 삼아 쑥쑥 자라고 있었다.
...<불쑥 찾아온 사십춘기 그리고 이른 회고 #10>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