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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신러너 Feb 06. 2024

선천적으로 글러 먹었다

100m 스프린터와 42.195km 마라토너 중 당신은 어디인가요

무엇이든 행한다 다음엔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관둔다로 선을 그었습니다. 학교에 들어가면 입학 뒤에 졸업이 있었고 웨이트 트레이닝도 '올해까지만 정점을 찍고 그만해야지' 하고 스스로에게 암시하면 매몰차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제 종료 버튼을 눌렀습니다.


예컨대 42km 마라토너라기 보단 100m 스프린터에 가깝습니다. 단기간에 몰아치는 것은 자신 있는데, 짧게는 며칠에서 몇 주만에 끝내야 하는 속도전 프로젝트가 그것입니다. 작가이자 교수이자 엔지니어 선배인 최재붕 교수님은


엔지니어의 정의가 "무엇을 개선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1]


여기에 현업에 몸담고 있는 제가 한 가지 추가하자면, "제한시간 안에 무엇을 개선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훨씬 현업스러워집니다. 제한시간이 짧을수록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제한시간이 비교적 길게 주어지면 조금 더 이상적으로 문제의 원인을 파악할 시간을 벌게 되는 것이 큰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보다 현장에서 요구되는 것은 제한시간이 짧은데, 저는 이 것에 그럭저럭 퍼포먼스를 발휘한 것 같습니다.


조금 더 긴 시간지평을 말하자면 석 달 텀으로 돌아오는 중간/기말고사 준비는 할만했습니다. 피니쉬 라인에 가까울수록 페이스를 올리는 것이 가능했는데, 이 것은 꼭 책상에서 행하는 학습이나 배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스포츠에서도 비슷합니다. 지구력이 필요한 운동보단 순발력이 필요한 운동에 적합한 것은 좋든 싫든 그것은 타고난 나의 선천성입니다. 지구력 운동으로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는 오래 달리기나 수영보다는 순발력 운동으로 이겨야 할 상대가 있는 운동에 익숙합니다.


'내가 팀 경기에 적합한 인간인가'란 물음에 쉽게 '그렇다'라고 답하기는 어렵지만 어려서부터 팀 게임을 즐겨왔고 맥락에 따라서는 그런대로 팀을 이끌어보기도 하니, '적응했다'는 표현이 옳은 것 같습니다.


글쓰기에서 제가 느낀 것은 이 것이 나의 선천성과는 거의 반대편 극에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글쓰기는 100m 스프린터가 큰 보폭으로 전속력을 내달리는 공격적이고 도전적인 러너의 주법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것에 비하면 글쓰기는 장거리 주자 체질에 어울리는 작업입니다. 이 부분이 나에게는 고통인 것이, 끝이 있음은 어쨌거나 버틸 수 있는 신앙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글쓰기는 끝이 없음을 알면서도 계속 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리고 나서야 그 끝을 아주 먼 나중에서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버 페이스할 수 없습니다. 오버 페이스 하기 전에 팬을 딱 놔야 합니다. 곧 시간을 내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시간을 소중하게, 신중하게,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글쓰기는 다른 사람을 상대로 이기든 지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나 자산이 설정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에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나에게 익숙한 것이 누군가를 앞지르는 것이었다면 글쓰기는 누군가에게 추월당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이 것은 지는 일에 길들여지는 것으로 세상에는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산만큼 있고,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산더미처럼 있다." [3]


는 무라카미 선생의 인생 교훈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라는 긴 레이스에서 특정한 누군가에게 지든 이기든 그런 것은 러너—Learner&Runner—에게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떠한 경우엔 옆을 바라보면서 나도 힘낼 수 있는 동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옆 레인 상대가 멈춰버리거나 혹은 경기가 끝나버리면 러너로서 오래 지속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기에 창작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그 창작의 동기는 자신 안에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집을 짓고 살아야 합니다. 바깥에서 기준을 찾는다거나 남의 집을 흉내 내서 리모델링할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1] 최재붕 <엔짱>

[2]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인으로서의 소설가> p167

[3]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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