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머신러너 Apr 15. 2024

Work  Play  Love(2) - Play

'왜 쓰냐'는 질문에 내가 찾은 답은 누군가, 무언가를 위한  게 아니다


Play


운명적 공대생으로 글을 쓴다고 하면 주변에서 "왜 쓰는 거예요"라고 거의 열이면 아홉, 질문을 받습니다. 처음엔 왠지 쑥스럽기도 해서 "뭐 그냥이요" 라며 얼버무렸습니다. 직업도 아닐뿐더러 글쓰기에서 예상되는 고된 작업을 하고 있다면 분명히 어떤 '목표'나 경제적 '이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해합니다. 나는 엔지니어고 내 주변에는 엔지니어 동료가 많습니다. 엔지니어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엔지니어링, 이 바닥에서 문제없는 일이 없듯 목표 없는 엔지니어도 없습니다. 이 바닥 게임의 룰 같은 것입니다. 글쓰기는 나에게는 딴 세상이야기 같습니다. 작가지망생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윤'이 목적이라면 이 일은 최악의 수임에는 분명하다는 겁니다. 100이 들면 최소한 50은 나와야 중간이라도 갈텐데 내가 느끼는 아웃풋은 많이 쳐줘야 5 아래입니다.


'왜 쓰냐'는 질문에 내가 찾은 답은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위해서' 쓰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5살 첫째 아들은 눈만 뜨면 '놀자'고 졸라댑니다. 주말 아침 일어나자마자 "놀자"로 시작해서 저녁 잠자리에서 "더 놀고 싶은데" 잠투정으로 끝납니다. 아이를 보고 있으면 놀이에는 어떤 목표도 없이 그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땅을 파고 모래성을 지어댑니다. 모래알이 흩어지면 곧 무너지는 성을 아무런 기대 없이 짓고 또 짓습니다. 다 놀고 집에 갈 때는 미련 없이 쿨하게 모래성을 부숩니다. '이럴 거면 왜 쌓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것은 '목표=의미'라고 못 박은 나의 고정관념 때문인 것 같습니다.


모래성 놀이는 쌓아 올리는 그 자체로 재미있습니다. 놀이가 그렇듯 결과에 대한 불안이나 걱정이 없어 세상 이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놀이는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위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에게 글쓰기는 놀이라는 것을 아들에게서 배웁니다. 이런 것을 보면 내가 아이를 기르고 키우고 성장시키는 줄로만 알았는데 웬걸요. 오히려 내가 아이 덕에 성장합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을 것을 아이로부터 깨우치는 경우가 부쩍 많아졌습니다. 아이에게 놀이하는 이유가 오롯이 재미인 것처럼 나에게도 글쓰기는 재미입니다.


굳이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나'를 위한 것입니다.

무언가를 위해서라면 '재미'를 위한 것이고요.


선배 작가들로부터─이들은 나 같은 후배를 두었다는 것은 모르겠지만─아이디어를 흡수하고 배운 것을 조합하고 재창작하는 과정은 꽤나 흥미롭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이전에 찾아 둔 딱 알맞은 맥락적 문구를 매끄럽게 완전한 문장으로 만들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

한 주에 두 편 연재를 위해 대략적인 구도를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굴려봅니다. '이제 써볼까' 하면 첫 번째로 드는 감정은 '이번 연재에는 어떤 글이 써지려나'처럼 완성에 대한 기대입니다. 이런 창작의 '기대'가 '고통'보다 크면 그런대로 꾸준히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기대가 되는 것은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짧은 초고가 완성되고 연재로 등록하면 꽤나 홀가분합니다. 마라토너에게 '러너스 하이'가 있듯이 나에게도 '연재 하이'가 있습니다. 매주 어느 정도의 압박감으로 '계속할 수 있을까' 의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연재 하이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압박감 속에 물에 빠져 허우적 되는 기분도 들지만 이 연재 하이로 말끔히 씻겨집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자기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재미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김정운 [1]


연재 하이는 어마어마한 울림 있는 것이라기 보단 조근조근 내 안의 귓속말에 가깝습니다. 이런 작고 사소한 재미를 즐기기 위해 씁니다.


재미있는 놀이도 그만두게 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일처럼 하면 됩니다. 놀이를 정해주고 이 순서대로 하라던지 정해진 놀이를 하라고 하는 겁니다. 이러면 하기 싫어집니다. 재미있게 노는 아이는 자기가 선택한 놀이를 합니다. 나에게 글쓰기가 '플레이 스테이션'인 것은 누구도 아닌 내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일에서도 정해진 자유도 범위 내에 가능한 자율성을 높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그저 내 맘대로 하면 '편해서' 라는 식의 태도는 아닙니다. 그것이 가장 좋은 성과를 내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잘되지는 않았더라도 자율성에 따라 한 일들의 수준이 확실히 높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일처럼 어떤 순서를 정하지도 않았고 '누구 씨 이 주제로 글을 쓰세요'처럼 시켜서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프로 직업 작가쯤은 되어야 이런 요청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글쓰기가 플레이일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기본적으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율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율적으로 하면 잘할 수 있을 때까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끝낸다'를 정할 때까지 하면 잘한 것입니다. 나중에 와서 보고 '이건 좀 별로네'라고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최선을 다해서 끝낸 겁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해서 한 일에는 후회할 이유가 없습니다.




[1] 김정운 <노는 만큼 성공한다>


*5~9화: 근면한 글쓰기
*10~15화: 채집하는 글쓰기
*16화~: 고립되어 글쓰기


이전 17화 Work  Play  Love(1) - Work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