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있는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 좋은사람 이야기
<지난 연재>
단순한 하나의 연결이 나는 좋습니다. 여러 사람과 얇고 엉켜있는 커넥션으로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것보다 단 하나의 단단한 커넥션으로 에너지를 집중할 때가 재미있습니다. 그것이 이야기를 풍부하게 합니다. 글쓰기는 고독한 작업이지만 그 고독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세상과의 연결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글감이 되어 나무상자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재료들로 한 편의 이야기를 빚어냅니다.
재료를 구하려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옛날 고대인들은 소피스트에게 귀를 기울였습니다. 소피스트는 오늘날로 치면 '일타강사'입니다. 일타강사는 명석한 건 기본이고 말재주로 먹고 살만큼 훌륭한 스피커입니다. 오프라인 물리 세계를 넘어서 온라인 디지털 세계까지 모두 이들의 말에 귀 기울입니다. 지금의 일타강사 위상을 보면 고대 소피스트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그리 기분 나빠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소피스트는 돈을 받고 논리나 사람을 설득하는 기술을 알려준 전문 호사가입니다. 소피스트들도 자신의 말을 멈추고 귀 기울인 사람이 있는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영어에 조정석 수학에 현우진이라면 '말하기·듣기'는 단연 인문학 만물박사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귀 기울이고 싶어 하는지를 <수사학>[1]에서 알려줍니다. 이것을 세 가지 핵심 요소로 명쾌하게 정의했습니다.
첫 번째는 로고스입니다. 이야기에 말이 되는 논리가 있는가를 따지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이야기는 듣는 즉시 이해가 되고 또 재미도 있습니다. 이야기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 '그것 참 말이 되네'정도로 그럴싸하면 우리는 귀를 기울입니다.
엔지니어링의 반은 '듣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디. 나머지 반은 들은 그 문제를 푸는 것입니다. 엔지니어링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다양한 여러 회사와 함께 일해야 합니다. 같은 회사 안에서도 여러 팀들과 일해야 하고요. 팀 안에서도 여러 팀원들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엔지니어의 숙명이 우선 듣기로 시작해서 그런지 나는 듣는 건 잘해도 말하기는 언제나 부담스럽고 어렵습니다. 내 말이 논리적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말이나 글을 어떻게 해야 논리적으로 표현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말 저말 여기저기서 많이 듣다 보니 글보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슨 말을 하는지 영 모르겠네'나 '계속 듣고 있기 조금 힘드네' 같은 말의 특징은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가장 단순하면서 확실한 사실은 스피커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할 때 우리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논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해도 이런 말은—죄송합니다만 —금세 듣기가 힘들어집니다. 말이 가래떡 끊기 듯 뚝뚝 끊겨서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모두 곤욕입니다. 둘째는 오디오는 채워야 하다 보니 여러 번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됩니다. 본질은 꿰뚫지 못하고 주변만 빙글빙글 돌면서 점점 멀어집니다. 속 빈 강정과 같은 이야기만 되풀이합니다. 많은 경우 알지 못하는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은 '높은 사람'입니다. 권위를 앞세워서 말이 안 되는 것을 말이 되는 것처럼 하는 것이 세 번째입니다.
이 세 가지를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그렇게’ 말해보았기 때문입니다. 화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말해보니 청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말하는 화자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들만이라도 줄여 나간다면 논리란 것에 조금씩 근접하고 있을 것이란 게 나의 생각입니다.
두 번째는 파토스입니다. 파토스는 귀 기울이는 청중의 감정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이야기에 논리가 부족하더라도 말하는 사람의 진심은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것은 화자의 목소리에 작은 떨림으로 전해질 수도 있고 잠시 멈춰 선 침묵 속에서 느끼기도 합니다. 왜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냥 '인간이니까'란 답이 가장 명쾌한 답인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없는 글에서도 감정은 전해집니다. 오히려 나의 목소리로 글을 읽어 나가는 느낌을 받으면 공감은 증폭되기도 합니다. 진심으로 와닿는 작가의 진심은 책을 뚫고 나와 독자의 가슴에 와닿습니다. 책을 더 이상 읽어 내려갈 수 없을 때 우리의 행동을 보면 압니다. 우리의 행동은 읽던 책을 그대로 가슴팍에 가져가는 것입니다. 나도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가슴팍까지가 욕심이라면 독자의 손에라도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숨 쉬는 글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감동을 주는 글을 쓰는 것이 욕심이라면 읽는 이에게 공감될 수 있는 글이라도 나는 대만족입니다.
손에라도 가까이에 그리고 공감될 수 있는 글이 되려면 우선 나의 손에 가까이에 있어야 하고 스스로 공감되는 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쓰고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글을 남에게 읽으라고 할 수 없고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글을 타자에게 공감하라고 강요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나로부터 시작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에 가깝게 그리고 공감되는 글이 된다면 언젠가는 내 글도 누군가의 가슴팍에 와닿아 감동까지 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꿈꿔봅니다.
마지막은 에토스입니다. 누가 그 말을 하느냐입니다. 결국엔 사람입니다. 스피커 혹은 작가가 얼마나 믿을 만한 사람인지 얼마나 신뢰할 만한지에 따라 우리는 듣기도 전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닫아버리기도 합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이 세 가지, '논리있는 이야기-로고스' '감동적인 이야기-파토스' '좋은사람 이야기-에토스'에는 자연스럽게 귀 기울어집니다. 이런 이야기는 자꾸 듣고 싶어 집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은 좋은사람 이야기라고 확신합니다. 논리적인 이야기와 감동적인 이야기는 들어 보아야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에 선행하는 것은 단연코 좋은사람 이야기입니다. 듣기도 전에 들을지 말지 판단하니까요. 이것은 마치 사람을 만날 때 첫인상이 반 이상인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단 영점일초 만으로도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처음 내린 판단은 오히려 더 강화됩니다. [2]
재료를 구하러 서점에 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첫눈에 느낌이 오는 책을 우선 집어 들고 책 표지 안쪽에 날개를 펴서 어떤 사람인지 유심이 살핍니다. 아무래도 한 번쯤은 들어본 유명한 사람에게 귀 기울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세상에는 위대한 천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나도 세상을 바꾼 스티브 잡스와 일론 머스크의 팬입니다. 이들뿐이겠습니까. 이들의 전기에서 위대함을 느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더 나아가 극히 일부분은 우리 삶에 적용해 보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2] (논문) 윌리스 제인 '첫인상: 얼굴을 0.1초 동안 본 후 마음을 정하다'
*05~09화: 근면하게 글쓰기
*10~15화: 채집하는 글쓰기
*16화~22화: 고립되어 글쓰기 ← 이번화 추가
*23화~: 몰입하여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