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질문 다른 하루

<상상농담 25> 이명욱 <어초문답도>

by 안노라

매 순간 집중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주어진 하루하루는 산만합니다. 한 손엔 노란색을 다른 한 손엔 파란색 크레파스를 들고 밑그림도 없는 도화지 앞에 앉아 있습니다. 내가 뭘 그리고 싶은지 알지 못합니다. 양손에 각기 다른 색을 들고 순서 없이 칠하는 하루는, 마치 사진 속 포즈처럼 비슷비슷합니다. 그 비슷비슷한 하루가 같은 시간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건 다른 배경 때문입니다. 배경은 저마다 찬란합니다. 해가 뜰 때도, 해가 질 때도, 별이 빛날 때도, 달이 이울 때도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반짝이는 그리움을 남깁니다.


화가 이명욱은 17세기 후반, 조선의 화원(畵員)이었습니다. 생몰년은 전해지지 않으며 <북새선은도-(주: 변경지역에 베푼 임금의 은혜), 1664년>로 유명한 한시각(韓時覺 1621-1691 이후)의 사위였다고 합니다. 숙종이 그의 재주를 아껴 직접 도장을 새겨주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름난 화원의 사위이자 임금이 인정하는 재능을 가졌고 도화서에서 화원 지망생을 가르칠 정도의 실력을 갖춘 그가 후대에 남긴 작품은 단 하나입니다. 배경은 침묵하고 주인공의 대화가 전부인 그림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 17세기 후반>입니다.


이명옥 <어초문답도, 17세기 후반>


구멍 뚫린 갓을 쓰고 왼 손엔 풀잎으로 단단히 아가미를 꿴 물고기를 들었습니다. 길고 낭창한 낚싯대의 무게를 견디느라 어깨를 타고 손등과 손목으로 이어지는 뼈마디가 불끈합니다. 약간 붉은 그의 얼굴은 초상화인양, 눈가의 작은 주름 풀뿌리처럼 서 있는 머리털까지 선명합니다. 다부진 몸을 감싸는 굵고 강단 있는 옷 선 아래로 힘 있게 딛는 종아리의 근육과 발가락이 보입니다. 아마도 그는 힘깨나 쓰는 어부인 모양입니다. 튀어나온 광대뼈와 콧방울이 넓은 코도 그의 활력을 말해줍니다.


맞은 편의 사내는 좀 더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졌네요. '지촬'이라는 한나라식 두건을 쓰고 허리춤엔 도끼를 찔러 넣었습니다. 신발을 신고 투박한 장대를 들었으니 <어초문답도>라 한 작품의 등장인물 중 이이가 나무꾼이겠지요? 기운 자국이 있는 옷을 보니 형편이 그리 넉넉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혹 형편을 개의치 않는 걸까요?


둘은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말풍선이 있었다면 대화의 내용을 엿들을 수 있었을 텐데 화원 이명옥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한걸음 깊은 교양을 요구하네요. 실은 이 어부와 초부는 유교의 사상을 쉽게 소개하기 위해 쓴 <어초문대(漁樵問對)>에 나오는 인물들입니다. <어초문대>는 북송시대 철학자 소옹(邵雍, 1011~1077)이 썼습니다. 소옹은 어부와 초부라는 두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해 지금의 세상과는 달리 '군자는 정의를 쫒고 소인은 이익을 좇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자연의 진리와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도 토론했습니다. 이후 이 힘깨나 쓰는 어부는 낚시로 세월을 낚는 인자(仁者)의 상징이며, 넉넉지 못한 형편의 초부는 자연의 철리(哲理)를 찾아 산에 묻혀 사는 지자(智者)의 상징입니다.


인자(仁者)는 꿈도 못 꾸고 지자(智者)는 택도 없지만 '파란색 해를 띄우고 노란색 밤이 오는 그 특별한 하루'를 그리려는 저는, 그저 어부와 초부가 무성한 갈대숲 사잇길에 서 있는 것을 다행히 여깁니다. '진리'와 '본질'같이 중심이 강한 것을 찾는 두 은일자(隱逸者) 사이로 때로 거센 바람이 불겠지요. 바람이 불면 눕고 그치면 일어서는 갈대가 가끔은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 끼어 수다스럽게 서걱거리기도 할 테지요? 그러면서 질문인지 대답인지 모를 이런 말을 떨어뜨리지는 않을까요?


인간은 늘 같은 걸 묻지만 자연은 늘 다른 대답을 한다.



PS : 제가 어부 한 명을 더 압니다. 그는 84일 동안 한 마리도 낚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그는 먼바다로 나가 제 배보다도 큰 청새치와 사흘 낮밤, 사투를 벌입니다. 그 과정에서 어부는 청새치에게 형제애를 느끼지요. 아마도 그건 '동일한 생명체로서 결코 굴복하지 않으려는 존엄함'에 대한 공감이었을 겁니다. 그 어부의 눈동자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Everything about him was old except his eyes, and they were the same color as the sea and were cheerful and undefeated.

그의 모든 것이 늙었으나, 눈동자는 예외였다. 바다와 같은 색을 지닌, 생기가 넘치는 무적의 눈동자였다.

-어네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중-


*글이 늦어 넘 죄송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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