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졌습니다. 공기와 햇빛에서 들뜨고 산만한 청춘을 지나 퇴락했지만 격을 갖춘 중년의 분위기가 납니다. 아파트 담벼락 침묵이 길고, 잔디며 나무며 초록이 물들었던 자리마다 그늘이 짙습니다. 한낮의 광폭한 열기를 식히느라 연일 치솟았던 분수는 열일하다 번아웃된 직장인 마냥 퍼져 있습니다. 발랄하고 날랜 걸음으로 나무 밑동 사이사이를 골라 디디던 길냥이들도 허리를 쭈욱 펴며 눈을 반짝입니다. 찌르는 빛과 흐르는 빛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나 봅니다. 얼마 전, 날카로운 말로 베인 상처가 아직 쓰린 저는 냉큼 집을 나섰습니다.
아물지 못한 상처를 다스리는 데는 산책만 한 게 없습니다. 천천히 호수공원 수변로를 걷습니다. 햇빛의 간지럼에 호수의 잔물결이 뒤둥거립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물비늘의 "까르르" 소리가 들립니다. 전 주의 깊게 앞, 뒤, 좌, 우를 살핍니다. 다행히 아무도 없습니다. 목청 먼저 가다듬습니다.
"아 에 이 오 우, 아 아아 아아아 아아아아~"
전 제가 타고난 성악가, 형편이 도와주지 않은 불운한 가수인 줄 알았습니다. 저와 퇴근길 노래방은 참새와 방앗간이었지요. 물론 그것이 노래였는지 절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언제부터인가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하고 떨림이 세져서 노래를 부르지 못합니다. 아니 부르긴 하는데 제 귀가 듣기에도 몹시 괴로운 소리가 납니다. 심히 불편합니다. 이로써 확실한 건 성악가로 타고나지도, 가수로 불운하지도 않았던 거지요. 그저 평범하게 노래를 좋아하는... 쯧쯧
우쨌든 하여간 오늘은 타인을 배려할 여유가 없는 데다 마침 주위에 아무도 없습니다. 막무가내로 노래를 불러봅니다. 갑자기 제 옆으로 자전거 한 대가 씨잉 지나가는데 사이클리스트가 안장에 앉은 채 휙 뒤돌아 봅니다. 돼지 멱따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싶었나 보지요? 얼굴이 확 붉어집니다.
"미리 클랙슨을 누르지 않고. 창피하게. 치, 가다가 꽈당 넘어져라."
나이 먹는다고 심통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중년이라고 다 격이 갖춰지지도 않습니다.
그런 절 앵무새가 쳐다보네요.
아서 존 엘슬리 <노래 레슨, 1909>
19세기 중반, 해가 지지 않는다는 영국의 부유한 중산층은 보수적인 가치를 존중했습니다. 명예로운 도덕을 갖춘 개인, 다정하고 자애로운 가정, 약자를 보호하고 질서를 지키는 사회를 지향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애완동물이 있는 장르화가 대두되었고 인기를 끌었지요. 그러한 빅토리아 시대 최고의 화가, 아서 존 엘슬리(Arthur John Elsley, 1860~1952)는 한창 노래 배우기에 열중하고 있는 앵무새를 그렸습니다. <노래 레슨, 1909>입니다.
창 밖엔 흰 눈에 덮인 나뭇가지가 보입니다. 겨울입니다. 아, 악보에 Christmas Carol 이라고 적혀 있는 걸 보니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군요. 성탄 전야에 부를 노래인가 봅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두 소녀가 나무 의자 등받이 위에 앉은 앵무새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중입니다. 벌린 입술 아래 가지런한 치아가 발그레한 두 볼보다 더 앳됩니다. 소녀들의 금빛 머리카락은 등불처럼 주위를 따뜻하고 환하게 밝힙니다. 날개가 있었다면 천사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빨간 몸통에 파랗고 노란 깃의 화려한 날개를 가진 위풍당당 앵무새는 표정이 밝지 않습니다. 전 저으기 당황합니다. 헨델의 메시아 중 '할렐루야' 정도라면 모를까 차임벨 딩동거리는 크리스마스 캐럴이라서인가? 혹 '꼬마야, 난 좀 더 웅장한 곡을 원해' 라며 짐짓 딴청을 부리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전 앵무새의 표정이 궁금해 자세히 들여다보다 그만 서글퍼지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의 천진하고 맑은 표정 맞은편, 앵무새의 다리는 사슬로 묶여 있었습니다. 검고 차가운 쇠붙이의 비릿하고 날 선 냄새가 코로 스며들었습니다. 앵무새는 2~3살 정도의 아이 지능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간단한 숫자를 이해하고 색을 구분하며 사람의 혀와 비슷한 혀를 가지고 있어 사람의 말을 따라 할 수 있다고 하지요. 대부분 말을 따라 할 뿐 언어의 뜻을 이해하지는 못한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일부 지능이 뛰어나고 훈련받은 앵무새는 단순한 문장일 경우, 의미 있게 구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천사 같은 소녀와 사슬에 묶인 앵무새는 리플레이 버튼을 누른 것처럼 절 '얼마 전'으로 되돌렸습니다. 그녀는 제가 신뢰와 존경을 가졌던 분이었습니다. 서너번의 연락에도 회신이 없었습니다. 전 "혹시 제가 실수한 것이 있나요?"라고 솔직하게 물었습니다. 그녀는 "그런 걸 묻는 것 자체가 내게 잘못하는 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서둘러 전화를 끊었습니다. 한참을 거리에 서 있었지요. 꼬투리에서 터져 나와 사방팔방 튀는 감정을, 마침 내륙까지 밀고 온 태풍이 모조리 쓸고 갔습니다. 뒤집힌 우산을 버렸고 베어진 상처에 시간이라는 약을 발랐습니다. 시간은 나보다 지혜로우니까,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 중요한 것이니까요.
때로 어떤 것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입장의 차이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노래를 가르치려는 소녀와 노래를 배우는 앵무새와 그걸 그리는 화가가 모두 당당하고 옳은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어른이 되어 갑니다. 모순과 아이러니에 속에서도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세상을 배워갑니다. 이 작품은 많은 영국인들의 거실에 걸렸고 달력과 잡지에 실렸습니다.
수변로의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기가 죽어 노래는 부르지 못하고 팔다리에 힘을 주어 하낫 둘 하낫 둘 하며 속도를 냅니다. 이마에 땀이 솟습니다. 굼뜬 다리에 착착 구령이 붙을 즈음, 자전거 한 대가 슬그머니 제 옆으로 다가와 보폭에 맞춰 속도를 늦춥니다. 허벅지가 제 허리만 한 남자 사이클리스트입니다. '에공, 큰일 났다. 내 구시렁을 들었나?' 싶어 나도 몰래 길 옆으로 몸이 기우는데.
"저기, 아까 그 노래, 가사가 틀렸어요. 우리가 느끼며 바라볼 하늘과 나무들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며 바라볼 하늘과 사람들'이에요."
그러더니 저를 뒤로하고 씩씩하게 노래 부르며 햇빛 아래를 쌩~하고 달려갑니다. 돼지 멱따는 소리만큼은 아니지만 코끼리 울음소리만큼 우렁찹니다. 수변로를 따라 흐르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힘겨운 날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들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햇살이 눈부신 곳 그곳으로 가네."